부처님의 가르침

원효스님과 해골 물

우암(雨庵) 2015. 12. 9. 11:42

우리들은 원효스님의 깨달음이 해골물에서 기인한다고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이는 잘못된 내용이라고 합니다.

해골물 관련된 내용은 국내 문헌에는 없고

중국의 송나라 찬녕스님이 지으신 송고승전 권4의 당신라국의상전에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송고승전 내용이 국내에 남아있는 원효스님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고

특히 깨달음에 대해서는 기록이 다른 모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해골 물에 대해서 글을 써 볼까 합니다.

그 이유는 이 이야기 구조가 우리 인생과 많이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원효스님께서는 불교를 배우기 위해서 당나라로 유학을 가려합니다.
구법의 길을 가시면서 하루는 인적이 없는 산 속에서 노숙을 하게 됩니다.
어둠 속에서 비바람과 한기를 피하려 마침 찾으신 흙집으로 들어가고
어둠속에서 갈증을 느껴 손에 잡힌 바가지 속의 물을 달콤하게 마시게 됩니다.
그런데 다음 날, 날이 밝아져서 주변을 살펴보자
어제 잠든 곳이 흙집이 아니라 무덤 안이었으며
물을 마신 바가지가 해골바가지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확인하시고는 더럽고 구역질이나는 것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득 스님께서는 이 경계에서 깨달음을 얻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마음의 문제라는 것이었죠.
어제 어두운 밤 갈증이 날 때에는 그렇게 달콤하던 그 물이
밝은 대낮에 보니 해골에 담긴 물인 것을 보고는 혐오스럽고 구역질이 나니까요.
물은 같은 물인데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느낌이 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남기십니다.

심생즉 종종법생(心生則 種種法生)
심멸즉 감분불이(心滅則 龕墳不二)
삼계유심 만법유식(三界唯心 萬法唯識)
심외무법 호용별구(心外無法 胡用別求)

마음이 일어나니 다양한 분별 대상(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멸하니 흙집(龕 삶을 담는 그릇?)과 무덤(墳 죽음)이 둘이 아니로구나.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가 오직 마음일 뿐이고 모든 세상 일이란 오직 분별일 뿐이네.

마음 밖에는 분별 대상(법)이 없는데 (마음을) 어찌 이용하여 따로 구하려 하는가?

龕 [감실 감]  1. 감실(龕室: 신주를 모셔두는 장(欌)) 2. 절의 탑 3. 그릇 4. 용 모양
墳 [무덤 분]  1. 무덤, 봉분(封墳) 2. 언덕 3. 둑(높은 길을 내려고 쌓은 언덕)
胡 [되 호,오랑캐 이름 호,수염 호] 1. 되(분량을 헤아리는 데 쓰는 그릇 또는 부피의 단위) 2. 오랑캐 이름 3. 수염, 구레나룻(귀밑에서 턱까지 잇따라 난 수염) 4. 턱밑살 5. 풀 6. 성(姓)의 하나 7. 어찌


저는 이 이야기에서

무엇인가를 향상하려는(부족함을 채워보려는) 마음에서 길을 떠나고 (구도의 시작)
어두운 밤에 (즉 무명의 상태에서) 무덤(몸)이 무덤인 줄 모르고 들어가며
갈증이 생겨서 (즉 갈애가 생겨서)
해골바가지의 물인 줄 모르고 (해골바가지란 우리가 윤회를 계속하게 되는 것을 은유한 것)

그 물이 달콤하다면서 마셨는데 (감각적인 욕망(kāmarāga)에 빠져서)
아침에 보니(원효 元曉; 깨닫고 나서 보니, 元曉는 새벽이란 뜻)
동굴(현생의 집)은 죽음이 기다리는 무덤(몸)이요,
동굴안 달콤한 물이란 윤회를 유지시켜주는 해골바가지의 혐오러운 물이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진위를 떠나서 철저하게 부처님 가르침을 은유한 것으로 보입니다. _()_


아래는 송고승전의 원문을 번역한 것입니다.


먼저 해골물 이야기가 있는 의상스님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ky_drum&logNo=80119456687&categoryNo=40&parentCategoryNo=0&viewDate=¤tPage=2&postListTopCurrentPage=&from=postList&userTopListOpen=true&userTopListCount=5&userTopListManageOpen=false&userTopListCurrentPage=2에서 모셔온 것을 제가 손을 좀 보았습니다. 주목할 것은 해골 물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흙집과 무덤에 대한 이야기만 나옵니다.


당신라국의상전(唐新羅國義湘傳)

석의상(釋義湘). 속성은 박(朴)이오 신라 사람이다. 나서부터 자못 영기(英奇)가 있었다. 커서는 속세를 떠나 소요입도(逍遙入道)하니 성품은 하늘을 닮았다(天然)한다. 약관의 나이에 당나라에서 교종(敎宗)이 융성함을 듣고 원효법사(元曉法師)와 뜻을 같이하여 서쪽으로 가려했다. 당나라의 당주계(唐州界)에 이르러, 큰 배를 구하여 바다를 건너려 했다.
길을 가던 중 갑자기 큰 비를 만나 길 곁 흙집(土龕) 사이에  의지해 몸을 피했다. 비바람을 피하고 다음날 아침에 이르러서야 상태를 보니 옛 무덤의 해골이 곁에 있다. 하늘에선 가랑비가 내리고 땅은 진흙탕이었다.
한치 앞을 나아가기도 어려워서 가지 않고 한동안 머물러 벽에 기대고 있으려니, 한밤중에 괴물(鬼物)이 문득 있어 괴이하였다.
원효 스님께 탄식해 말하길, "임시로 정한 거처가 흙집(土龕)이라 하여, 지난 밤 머물러 의지한 곳이 귀신의 집인데 많고도 높구나(多崇?).

심생고종종법생(心生故種種法生).
심멸고감분불이(心滅故龕墳不二)
삼계유심만법유식(三界唯心萬法唯識)
심외무법호용별구(心外無法 胡用別求)

나는 입당(入唐)치 않으리라."라 했다. 등짐을 물리치고 신라로 돌아갔다. (여기 까지가 원효 스님의 이야기)

의상은 짝을 잃고 홀로 가면서 죽어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총장(總章) 2년 상선(商船)에 딸려 등주(登州) 해안(海岸)에 달(達)해 분위(分衛-수행자가 남의 숙식을 얻는 일)로 일신사가(一信士家)-한 믿음직한 집에 이르렀다.
상(湘)의 용색(容色)이 정발(挺拔-빼어남)을 보고 문하(門下)에 유련(留連-계속 머무름)시키기 오래에 여복정장(麗服靚粧-복장과 단장이 화려함)한 소녀(少女)가 있어 이름을 선묘(善妙)라 하였는데 。교미(巧媚-교활한 아첨)로 회(誨-꾐)하길, "상심(湘心-의상의 마음)은 석불가전(石不可轉-돌을 옮길수 없음과 같음)이다."라 했다. 그녀가 조롱함에도 답하지 않으니 갑자기 도심(道心)이 발(發)하였다. 전(前)에 대원언(大願-부처가 중생을 구하려는 마음)을 시(矢-맹세)하여 말하길, "생생세세귀명화상(生生世世歸命和尙-나는 족족 화상에게 귀명하니) 습학대승성취대사(習學大乘成就大事-대승을 학습하고 대사를 성취한다) 제자필위단월공급자록(弟子必爲檀越供給資緣-제자는 반드시 단월을 위해 시주하라)"고 했다. 상(湘)은 이내 경월(徑趨-지름길을 달림)로 장안(長安)에 가서 남산(南山)의 지엄삼장소(智儼三藏所)에서 마쳤다. 화엄경(華嚴經)을 종습(綜習-다 익힘)했다. 이 때 강장국사(康藏國師)가 동학(同學)이 되었다. 소위(所謂) 지미지장유윤유요(知微知章有倫有要)다. 덕병운만(德甁云滿)이라 한다. 장해희유(藏海嬉遊-바다에 숨어 즐겁게 놂)하다 乃議 돌아와 전법(傳法)하고 개유(開誘)할 것을 논의했다. 다시 문등(文登) 옛 단월가(檀越家)에 이르러 그 수임공시(數稔供施-매번 공식 공양함)에 대해 사례(謝禮)하고, 다시 상성(商船)을 따라 해람(解纜-출범)을 준순(逡巡-머뭇거림)하니, 이 여자 선묘(善妙)가 예지(預知)로 상(湘)을 위하여 법복(法服)과 더불어 여러 십기(什器-각종 그릇)을 판집(辦集-힘써 모음)하여 협사(篋笥-상자)를 채울 수 있게 하고 해안(海岸)에 운림(運臨)하니 상(湘)의 배는 이미 달하였다. 그녀가 빌어 말하길, "나는 본래 실심(實心)으로 법사(法師)에게 공양(供養)코자 원(願)컨대 이 의협(衣篋-옷 상자)를 전선(前船-배앞)에 도입(跳入-빨리 들임)하라" 라 하고 말을 마치자 해랑(駭浪-시그러운 파도)에 투협(投篋-상자를 덤짐)하니 갑자기 질풍(疾風-거센 바람)이 불어서 마차 홍모(鴻毛-기러기 털)처럼 되었고 아든히 도입입선(跳入船)했다. 그녀가 다시 이에 놀라 "나 원(願)건대 이 몸이 변하여 대용(大龍)이 되려한다"며 축로(舳艫-배앞뒤)를 부익(扶翼-날개로 바침)해 도국전법(到國傳法-나라에 이르러 법을 전함)했다. 이에 바다에 양피투신(攘袂投身-소매걷고 몸을 던져)하니 원력(願力)이 난굴(難屈-굴복시키기 어려움)하고 지성(至誠)이 감신(感神-신을 감동시킴)함을 알고 과연(果然) 신형(伸形-펼친 모양)이 요교(夭矯-씩씩함)하거나 약(躍-빠름)해 其그 주저(舟底-배바닥)에 완연(蜿蜒-구불구불하게 됨)했다. 피안(彼岸-저쪽 해안)에 영달(寧達-무사히 도달)했다. 상(湘)이 입국(入國) 후에 산천(山川)을 편력(遍歷)하며 구진(駒塵)고 백제(百濟)가 풍마우불상급(風馬牛不相及)한 땅에서 말하길, "이 중지(中地)는 영산(靈山)으로 수진(秀眞-진정으로 빼어남)한 전법륜(轉法輪)의 장소다. 무하(無何-머잖아) 권종이부(權宗異部)가 모여 반천(半千)이 될것이다"라 했다.  상(湘)이 대화엄(大華嚴敎)를 묵념(默念)을 하며 복선(福善)의 땅이 아니면 흥할 수 없다고 했다 .이때 선묘(善妙) 용(龍)이 항수(恒隨-항시 따름)로 작호(作護-지켜줌)했다. 이 념을 잠지(潛知)해 대신(大神)이 현(現)해 허공(虛空) 중에 변(變)해 거석(巨石-큰 돌)로 화성(化成-변해 이룸)해 종횡(縱廣)으로 일리(一里)가 가람(伽藍-불도를 닦는 절)의 꼭대기를 덮었다. 작장타불타지상(作將墮不墮之狀-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는 모양)에 군승(群僧-승려 떼)들이 경해(驚駭-기이함에 놀람)하고 망지유촉(罔知攸趣-어쩔바를 모름)하며 사면(四面)으로 분산(奔散-흩어달아남)했다. 상(湘)이 곧 사중(寺中)에 입(入)해 이 경(經)을 부천(敷闡-펼쳐 밝힘)하여 동양하음(冬陽夏陰)으로 불초자지(不召自至-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옮)한는 사람이 많았다. 국왕(國王-나라의 왕)이 흠중(欽重-심히 공경함)하여 전장노복(田莊奴僕-장원과 노복들)을 베풀었다. 상(湘)이 왕(王)에게 말하길, "내 법(法)은 평등(平等)해 고하(高下-높낮음)이 공균(共均)하고 귀천(貴賤)을 동규(同揆-같이 생각함)한다. 열반경팔(涅槃經八-열반경의 제팔)에 재(財-재물)을 부정(不淨-깨끗치 못함)시하는데 어찌 장전(莊田-장원)을 가지고 어찌 노복(奴僕)을 쓰리오. 빈도(貧道)는 법계(法界)로 집을 삼고 우경(盂耕-밥거리를 몸소 갈음)으로 대님(待稔-곡식을 기다림)한다. 법신(法身)은 혜명(慧命)으로 이를 적(藉-몸소 감)하여 생(生-살아감)한다. 상(湘)이 강수(講樹) 개화(開花) 담총(談叢) 결과(結果)하여 등당도오(登堂睹奧-당에서 깊은 뜻을 앎)하는 사람은 곧 지통(智通), 표훈(表訓), 법체(梵體), 도신(道身) 수인(數人)이었다. 모두 껍찔을 깨고 비출(飛出-날아감)한 가류나조(迦留羅鳥)들이라했다. 상(湘)이 貴如說行。강선(講宣-강의를 베품)의 외에는 정근수련(精勤修練-열심히 수련에 몰두)했다.  장엄찰(莊嚴刹) 해미(海靡-바닷가)에 훤량(暄涼-따뜻하고 서늘함)을 탄(憚)하고 또 상행(常行)으로 예법(穢法-더러운 법)을 정세(淨洗-깨끗이 함)함을 뜻했다. 건세(巾帨-수건)은 불용(不用)했고 건조(乾燥)함을 기다르는 것으로 그쳤다. 삼법법의병발(三法衣瓶缽)의 남은 것을 지니고 타물(他物)을 더하지 않아, 무릇 제자(弟子)가 청(請)하여 다시 조차(造次-잠시도 떠남)할 것을 감히 하지 못했다. 그 이적(怡寂-기쁘고 고요함)을 엿보고 후에 계발(啟發)했다. 상(湘)이 곧 의해(疑解)를 따르니 재핵(滓核-찌꺼지)가 없었다. 이래로는 운유(雲遊-구름처럼 떠돎)하며 부정칭(不定稱-정해진 칭호 없이 가아심(可我心)했다. 탁석(卓錫)하여 거(居)하니, 학려(學侶-학문승)들이 봉둔(蜂屯-벌떼처럼 몰려듦)했다. 혹은 집필서(執筆書) 근에 연찰엽(鉛札葉)을 하고 초(抄)하되 결집록(結集錄)에 재언(載言)한 듯 하고, 여시(如是)로 의문수제자(義門隨弟子)를 목(目-눈)으로 하고 여운(如云) 도신장(道身章)이 이것이며 혹은 처(處-있는 곳)은 명(名-이름)으로 여운(如云) 추혈문답(錐穴問答) 등으로 했다.여러 장소(章疏)가 모두 화엄(華嚴) 성해(性海) 비로자나(毘盧遮那) 무변(無邊) 계경(契經) 의례(義例)를 밝혔다. 상(湘)은 본국(本國) 종(終)하였다. 탑(塔) 역시 있다. 호(號)하여 해동화엄초조((海東華嚴初祖)라 했다.


唐新羅國義湘傳
釋義湘。俗姓朴。雞林府人也。生且英奇。
長而出離。逍遙入道性分天然。
年臨弱冠聞唐土教宗鼎盛。與元曉法師同志西遊。
行至本國海門唐州界。計求巨艦。將越滄波。
倏於中塗遭其苦雨。遂依道旁土龕間隱身。
所以避飄濕焉。迨乎明旦相視。
乃古墳骸骨旁也。天猶霢霂地且泥塗。
尺寸難前逗留不進。又寄埏甓之中。
夜之未央俄有鬼物為怪。曉公歎曰。前之寓宿謂土龕而且安。
此夜留宵託鬼鄉而多崇。
則知心生故種種法生。心滅故龕墳不二。
又三界唯心萬法唯識。心外無法胡用別求。我不入唐。
卻攜囊返國。湘乃隻影孤征誓死無退。
以總章二年附商船達登州岸。分衛到一信士家。
見湘容色挺拔留連門下既久。
有少女麗服靚粧。名曰善妙。巧媚誨之。
湘之心石不可轉也。女調不見答。頓發道心。
於前矢大願言。生生世世歸命和尚。
習學大乘成就大事。弟子必為檀越供給資緣。
湘乃徑趨長安終南山智儼三藏所。綜習華嚴經。
時康藏國師為同學也。
所謂知微知章有倫有要。德瓶云滿。藏海嬉遊。
乃議迴程傳法開誘。復至文登舊檀越家。謝其數稔供施。
便慕商船逡巡解纜。其女善妙。
預為湘辦集法服并諸什器可盈篋笥。
運臨海岸湘船已遠。其女咒之曰。我本實心供養法師。
願是衣篋跳入前船。言訖投篋于駭浪。
有頃疾風吹之若鴻毛耳。遙望徑跳入船矣。
其女復誓之。我願是身化為大龍。
扶翼舳艫到國傳法。於是攘袂投身于海。
將知願力難屈至誠感神。果然伸形。夭矯或躍。
蜿蜒其舟底。寧達于彼岸。
湘入國之後遍歷山川。於駒塵百濟風馬牛不相及地。
曰此中地靈山秀真轉法輪之所。
無何權宗異部聚徒可半千眾矣。湘默作是念。
大華嚴教非福善之地不可興焉。
時善妙龍恒隨作護。潛知此念。乃現大神變於虛空中。
化成巨石。縱廣一里蓋于伽藍之頂。
作將墮不墮之狀。群僧驚駭罔知攸趣。四面奔散。
湘遂入寺中敷闡斯經。冬陽夏陰。
不召自至者多矣。國王欽重以田莊奴僕施之。
湘言於王曰。我法平等高下共均貴賤同揆。
涅槃經八不淨財。何莊田之有。何奴僕之為。
貧道以法界為家。以盂耕待稔。
法身慧命藉此而生矣。湘講樹開花談叢結果。
登堂睹奧者。則智通表訓梵體道身等數人。
皆啄巨[穀-禾+卵]飛出迦留羅鳥焉。湘貴如說行。
講宣之外精勤修練。莊嚴剎海靡憚暄涼。
又常行義淨洗穢法。不用巾帨。立期乾燥而止。
持三法衣瓶缽之餘。曾無他物。
凡弟子請益不敢造次。伺其怡寂而後啟發。
湘乃隨疑解滯必無滓核。
自是已來雲遊不定稱可我心卓錫而居。學侶蜂屯。
或執筆書紳懷鉛札葉。抄如結集錄似載言。
如是義門隨弟子為目。如云道身章是也。
或以處為名如云錐穴問答等。
數章疏皆明華嚴性海毘盧遮那無邊契經義例也。
湘終于本國。塔亦存焉。號海東華嚴初祖也。


원효 스님에 대한 글입니다.

http://blog.naver.com/min652/70001922773에서 모셔왔습니다.


송고승전 제4권

唐 新羅國 黃龍寺 沙門 元曉傳 (당 신라국 황룡사 사문 원효전)


釋元曉, 姓薛氏, 東海湘州人也.

스님 원효의 성은 설씨이고, 동해 상주의 사람이다.


丱䰂[髟/采]之年, 惠然入法, 隨師稟業, 遊處無恒.
勇擊義圍, 雄橫文陣, 仡仡然, 桓桓然, 進無前却.
蓋三學之淹通, 彼土謂之萬人之敵, 精義入神, 爲若此也.

총각의 나이[丱䰂之年관채지년]에 흔쾌히 불법(佛法)에 입문하여 스승을 따라 학업을 받았는데, 다니는 곳이 일정함이 없었으며, 의해(義解)의 세계를 용맹히 격파하고 문장의 진영을 씩씩하게 횡행하여 굳세고 흔들림 없이 정진하여 물러남이 없었다.
삼학(三學: 戒定慧)에 널리 통하여 저곳[신라]에서 그를 일컬어 ‘만인을 대적할 만하다’고 하였으니, 정밀한 의해가 신의 경지에 들어감이 이와 같았다.


嘗與湘法師入唐, 慕奘三藏慈恩之門, 厥緣既差, 息心遊往.

일찍이 의상(義湘) 법사와 함께, 현장 삼장(玄奘三藏)과 자은(慈恩)의 문하[또는 현장 삼장과 그가 머물던 사찰인 자은사 문중]를 흠모하여 당나라에 들어가려 했으나, 그 인연이 차질이 생겨서 갈 생각을 그만두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無何發言狂悖, 示跡乖疎. 同居士入酒肆倡家, 若誌公持金刀鐵錫. 或製疏以講雜華, 或撫琴以樂祠宇, 或閭閻寓宿, 或山水坐禪, 任意隨機, 都無定檢.
얼마 안되어, 말하는 것이 사납고 함부로 하였으며 행적을 나타냄이 어그러지고 거칠었으니, 거사들과 함께 주막이나 기생집에 드나들었다. 지공(誌公) 법사처럼 금속으로 된 칼이나 쇠로 된 석장(錫杖)을 가지고 있으면서, 혹은 소(疏)를 지어 잡화[화엄경]을 강론하기도 하고 혹은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사당에서 즐기기도 하였으며, 혹은 여염집에 기숙하기도 하고, 혹은 산이나 강가에서 좌선(坐禪)을 하기도 하였으니, 마음내키는 대로 하여 도무지 일정한 법식이 없었다.


時國王置, 徧搜碩德, 本州以名望擧進之, 諸德惡其爲人, 譖王不納.

당시에 국왕이 백고좌 인왕경 대회(百高座仁王經大會)를 개설하고서 대덕을 두루 구하였다. 본주[湘州]에서 명망으로써 그를 천거하였으나, 여러 고덕들이 그 사람됨을 미워하여 왕에게 참소하여 들여보내지 않게 하였다.


居無何, 王之夫人, 腦嬰癰腫, 醫工絕驗. 王及王子臣屬, 禱諸山川靈祠, 無所不至.
有巫覡言曰, “苟遣人往他國求藥, 是疾方瘳.”
王乃發使泛海入唐, 募其醫術.

얼마 안 있어 왕의 부인이 머리에 악성의 종기[癰腫옹종]가 생겼는데, 의공(醫工)들도 효험을 내지 못하니, 왕과 왕자와 신하들이 산천의 신령한 사당에 기도를 드려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어떤 무당이 말하기를, “만일 사람을 시켜 다른 나라에 가게 해서 약을 구하면 이 병이 곧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에 사신을 선발하여 바다를 건너 당에 들어가서 그 치료 방법을 찾게 하였다.


溟漲之中, 忽見一翁, 由波濤躍出登舟, 邀使人入海,
覩宮殿嚴麗, 見龍王, 王名鈐海.

그런데 남쪽 바다[溟漲명창] 가운데에서 갑자기 한 노인이 나타나서 파도에서 뛰쳐나와 배에 올라가서 사신을 맞이하여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궁전의 장엄함과 화려함을 보여주고 용왕에게 알현시켰으니, 용왕의 이름은 검해(鈐海)였다.


謂使者曰, “汝國夫人, 是青帝第三女也. 我宮中先有金剛三昧經, 乃二覺圓通, 示菩薩行也. 今託仗夫人之病, 爲增上緣, 欲附此經, 出彼國流布耳.”
於是將三十來紙, 重沓散經, 付授使人,
復曰, “此經度海中, 恐罹魔事.”
王令持刀裂使人腨腸, 而內于中, 用蠟紙纏縢, 以藥傅之, 其腨如故.
龍王言, “可令大安聖者, 銓次綴縫, 請元曉法師, 造疏講釋之, 夫人疾愈無疑. 假使雪山阿伽陀藥力, 亦不過是.”
王送出海面, 遂登舟歸國.

용왕이 사신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 왕비는 청제(靑帝)의 셋째 딸이다. 우리 용궁에 예전부터 <금강삼매경>이 있었는데, 곧 두 가지 깨달음[二覺]이 원만히 통하고 보살행(菩薩行)을 나타내었다. 이제 왕비의 병에 의탁하여 증상연(增上緣)을 삼아 이 경전을 부쳐서 저 나라에 출현시켜 유포시키고자 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삼십 장쯤 되는 중첩된 흩어진 경전을 사신에게 주면서 다시 말하기를, “이 경전이 바다를 건너가는 도중에 마구니의 장난[魔事]에 걸릴 지도 모른다.”라고 하고, 용왕이 칼을 가지고 사신의 장단지[腨腸천장]를 찢어 그 속에 넣고서 밀납 종이로 봉하여[纏縢전등] 약을 바르니, 장단지가 예전과 같았다.
용왕이 말하기를, “대안(大安) 성자로 하여금 차례를 매겨[銓次] 꿰매게 하고, 원효 법사를 청하여 주석을 지어 강론하게 하면, 왕비의 병이 낫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을 것이다. 가령 설산(雪山)의 아가타 약의 효력도 이것보다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용왕이 전송하여 해면에 나와서 드디어 배에 올라 귀국하였다.


時王聞而歡喜, 乃先召大安聖者, 黏次焉.

당시에 왕이 듣고서 기뻐하여 곧 먼저 대안 성자를 불러 차례에 따라 묶게[黏次점차] 하였다.


大安者, 不測之人也. 形服特異, 恒在市廛, 擊銅鉢, 唱言大安大安之聲, 故號之也.

대안이라는 사람은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이었는데, 형색과 차림새가 특이하였으며, 항상 저자거리에서 동(銅)으로 만든 발우를 치며 “크게 편안하시오[大安]. 크게 편안하시오.”라고 외쳤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王命安, 安云, “但將經來, 不願入王宮閾.”
安得經, 排來成八品, 皆合佛意.
安曰, “速將付元曉講. 餘人則否.”

왕이 대안에게 명하니, 대안이 말하기를, “경전만 가져오십시오. 왕의 궁궐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안이 경전을 얻고서 배열하여 여덟 품(品)을 만드니, 모두 부처님의 뜻에 합치하였다. 대안이 말하기를, “빨리 원효에게 가져다 주어 강론하게 하십시오. 다른 사람은 안됩니다.”라고 하였다.


曉受斯經, 正在本生湘州也.
謂使人曰, “此經以本始二覺爲宗. 爲我備角乘, 將案几在兩角之間, 置其筆硯.”
始終於牛車造疏, 成五卷.

원효가 이 경전을 받은 것은 바로 그 고향인 상주에 있을 때였다.
원효가 사신에게 말하기를, “이 경은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두 가지 깨달음을 종지로 삼고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소가 끄는 수레를 준비하여 책상을 두 뿔 사이에 두고 붓과 벼루를 놓아 주십시오.”라고 하고, 시종 소가 끄는 수레에서 주석[疏]을 지어 다섯 권을 만들었다.


王請剋日於黃龍寺敷演, 時有薄徒, 竊盜新疏.
以事白王, 延于三日, 重錄成三卷, 號爲略疏.
왕이 요청하여 날을 정하여[剋日] 황룡사에서 설법하기로 하였는데, 당시 경박한 종도(宗徒)가 새로 지은 주석을 훔쳐갔다.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어 사흘을 연기하여 다시 써서 세 권을 만들었으니, 이것을 <약소(略疏)>라고 한다.


洎乎王臣道俗, 雲擁法堂, 曉乃宣吐有儀, 解紛可則, 稱揚彈指, 聲沸于空.

왕과 신하, 승려와 속인에 이르기까지[洎계] 법당을 구름처럼 에워싸자, 원효가 이에 설법함에 위의가 있었으며, 얽힌 것을 풀어줌에 법칙으로 삼을 만하였으니, 칭찬하고 감탄하여 그 소리가 허공에 치솟았다.


曉復唱言曰, “昔日採百椽時, 雖不預會, 今朝橫一棟處, 唯我獨能.”
時諸名德, 俯顏慚色, 伏膺懺悔焉.
원효가 다시 소리 높혀 말하기를, “예전에 백 개의 서까래를 고를 때에는 비록 그 모임[百高座]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오늘 아침 한 개의 들보를 놓는 곳에서는 나만이 할 수 있구나.”라고 하였다. 당시 모든 유명한 고덕들이 얼굴을 숙여 부끄러워 하고 진심으로 참회하였다.


初曉示跡無恒, 化人不定, 或擲盤而救衆, 或潠水而撲焚, 或數處現形, 或六方告滅, 亦盃度誌公之倫歟.

처음에 원효가 행적을 보인 것이 일정함이 없었으며, 사람들을 교화하는 것에 고정됨이 없었다. 혹은 소반을 던져 대중을 구하기도 하고, 혹은 물을 뿜어 화재를 진압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여러 곳에서 형체를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모든 곳에 입멸할 것을 고하기도 하였으니, 배도(盃度)나 지공(誌公)의 무리와 같았다.


其於解性, 覽無不明矣, 疏有廣略二本, 俱行本土. 略本流入中華, 後有翻經三藏, 改之爲論焉.
그 신해(神解)한 성품에 있어서 보기만 하면 분명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소(疏)에 광략(廣略)의 두 본이 있으니, 모두 본토에 유행하였다. 약본은 중국에 유입되어 뒤에 번경 삼장[翻經三藏]이 그것을 고쳐 논(論)이라고 하였다.


系曰, 海龍之宮, 自何而有經本耶? 通曰, 經云龍王宮殿中, 有七寶塔, 諸佛所說諸深義, 別有七寶篋滿中盛之, 謂十二因緣總持三昧等.
良以此經, 合行世間, 復顯大安曉公神異, 乃使夫人之疾, 爲起敎之大端者也.

덧붙여 말한다. 바다의 용궁은 어디로부터 경본(經本)을 가지고 있게 되었는가? 통석(通釋)하기를, ‘경(經)에 이르기를, 용왕의 궁전에 칠보탑이 있고,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심오한 교의가 각각 칠보의 상자[篋협]에 가득히 담겨 있었으니, 십이인연과 총지(總持)와 삼매 등이다.’
진실로 이 경전을 세간에 유행시키고 다시 대안과 효공(曉公)의 신이함을 나타내었으니, 이에 왕비의 병으로 하여금 가르침을 일으키는 큰 단서로 삼은 것이다.


[註]
* 지공(誌公) : 양(梁)나라 때의 승려, 지공(誌公) 또는 보공(寶公)이라고도 한다. 금성 사람. 승검(僧儉)을 섬겨 선을 배우고, 예언을 하였으며, 거처가 일정하지 않고, 때도 없이 음식을 먹으며, 머리를 수 척이나 기르고, 언제나 맨발로 거리를 다니며, 가위, 칼, 거울 등을 끝에 단 석장(錫杖)을 짚고 다니던 신이한 스님이었다. <양고승전, 권10>
* 배도(盃度) : ?~426. 진(晉)나라 때의 승려. 기주 사람. 항상 나무 대접을 타고서 물을 건넜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이 배도 화상 혹은 배도 선사라고 불렀다. 세세한 계행을 닦지 않고, 술과 고기를 먹었는데, 신통력이 탁월했고 생사에 자재한 스님이었다. <양고승전, 권10>

출처: 은희경, <금강삼매경론>의 부록, 일지사, 2000.


 

唐新羅國黃龍寺元曉傳(大安)
釋元曉。姓薛氏。東海湘州人也。
丱[髟/采]之年惠然入法。隨師稟業遊處無恒。
勇擊義圍雄橫文陣。仡仡然桓桓然。進無前卻。
蓋三學之淹通。彼土謂為萬人之敵。
精義入神為若此也。嘗與湘法師入唐。
慕奘三藏慈恩之門。厥緣既差息心遊往。
無何發言狂悖示跡乖疏。同居士入酒肆倡家。
誌公持金刀鐵錫。或製疏以講雜華。或撫琴以樂祠宇。
或閭閻寓宿。或山水坐禪。
任意隨機都無定檢。
時國王置百座仁王經大會遍搜碩德。本州以名望舉進之。諸德惡其為人。
譖王不納。居無何。王之夫人腦嬰癰腫。
醫工絕驗。
王及王子臣屬禱請山川靈祠無所不至。有巫覡言曰。苟遣人往他國求藥。
是疾方瘳。王乃發使泛海入唐募其醫術。
溟漲之中忽見一翁。由波濤躍出登舟。
邀使人入海睹宮殿嚴麗。見龍王王名鈐海。
謂使者曰。汝國夫人是青帝第三女也。
我宮中先有金剛三昧經。
乃二覺圓通示菩薩行也。今託仗夫人之病為增上緣。
欲附此經出彼國流布耳。於是將三十來紙。
重沓散經付授使人。復曰。此經渡海中恐罹魔事。
王令持刀裂使人[月*耑]腸而內于中。
用蠟紙纏縢以藥傅之。其[月*耑]如故。龍王言。
可令大安聖者銓次綴縫請元曉法師造疏講釋之。夫人疾愈無疑。
假使雪山阿伽陀藥力亦不過是。龍王送出海面。遂登舟歸國。
時王聞而歡喜。乃先召大安聖者黏次焉。
大安者不測之人也。形服特異恒在市廛。
擊銅缽唱言大安大安之聲。故號之也。王命安。
安云。但將經來不願入王宮閾。
安得經排來成八品。皆合佛意。安曰。速將付元曉講。
餘人則否。曉受斯經正在本生湘州也。
謂使人曰。此經以本始二覺為宗。
為我備角乘將案几。在兩角之間。置其筆硯。
始終於牛車造疏成五卷。
王請剋日於黃龍寺敷演。時有薄徒竊盜新疏。以事白王。
延于三日。重錄成三卷。號為略疏。
洎乎王臣道俗雲擁法堂。曉乃宣吐有儀解紛可則。
稱揚彈指聲沸于空。曉復昌言曰。
昔日採百椽時雖不預會。今朝橫一棟處唯我獨能。
時諸名德俯顏慚色伏膺懺悔焉。
初曉示跡無恒化人不定。或擲盤而救眾。
或噀水而撲焚。或數處現形。或六方告滅。
亦盃渡誌公之倫歟。其於解性覽無不明矣。
疏有廣略二本。俱行本土。略本流入中華。
後有翻經三藏。改之為論焉。
系曰。海龍之宮自何而有經本耶。通曰。
經云。龍王宮殿中有七寶塔。諸佛所說。
諸深義別有七寶篋滿中盛之。
謂十二因緣總持三昧等。良以此經合行世間。
復顯大安曉公神異。乃使夫人之疾為起教之大端者也。



삼국유사의 원효스님 관련 부분입니다.

http://blog.naver.com/min652/70001870853에서 모셔왔습니다.


國遺事 卷第四

元曉不羈 [원효불기; 원효, 구애받지 않다]


聖師元曉 俗姓薛氏 祖仍皮公 亦云赤大公 今赤大淵側有仍皮公廟 父談捺乃末
성사 원효(聖師元曉)의 속성은 설씨(薛氏)이다. 그의 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한다. 지금 적대연(赤大淵) 곁에 잉피공의 사당[廟]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내말 담날(乃末談捺)*이다.
* 신라 관등 11등급에 해당하는 내마(柰麻)벼슬을 한 지방관리로서, 이름은 담날(談捺)이다.


初示生于押梁郡南(今章山郡) 佛地村北 栗谷娑羅樹下 村名佛地 或作發智村(俚云弗等乙村)
(원효스님은) 압량군[押梁郡: 지금의 장산군(章山郡)] 남쪽, 불지촌(佛地村)의 북쪽에 있는 율곡(栗谷: 밤나무골)의 사라수(娑羅樹)* 아래에서 태어났다. 불지촌이란 마을 이름은 발지촌[發智村: 속언에는 불등을촌(弗等乙村)이라 함]이라고도 쓴다.
* 석가모니께서 열반한 장소에 있던 나무.


娑羅樹者 諺云
師之家本住此谷西南 母旣娠而月滿 適過此谷栗樹下 忽分産 而倉皇不能歸家 且以夫衣掛樹 而寢處其中 因號樹曰娑羅樹
사라수(娑羅樹)의 유래에 대해서 세속에 전하는 바로는 이러하다.
원효스님의 집이 본래 율곡의 서남쪽에 있었다. 그 어머니가 [스님을] 잉태, 만삭이 되어 마침 그 골짜기, 즉 율곡의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홀연 해산을 했다. 너무 급해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 그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어두고 그 속에 누워 해산했다[寢處其中]. 그래서 그 밤나무를 사라수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其樹之實亦異於常 至今稱娑羅栗 古傳 昔有主寺者 給寺奴一人 一夕饌栗二枚 奴訟于官 官吏怪之 取栗檢之 一枚盈一鉢 乃反自判給一枚 故因名栗谷
그 나무의 열매가 또한 보통 나무와 달리 특이하여 지금도 그것은 사라율(娑羅栗)이라 불리고 있다. 옛부터 전하기를, 옛적 어떤 주지[主寺者]가 그 사노(寺奴)들에게 하룻저녁의 저녁밥거리[一夕饌]로 한 사람 앞에 밤 두 알씩 나누어 주곤 했다. 사노들이 불만을 품고서 관가에 고소를 했다. 관리가 이상스러워 그 밤을 가져다가 검사해 보았더니, 밤 한 개가 발우(鉢盂) 하나에 가득 찼다. 그러자 그 관리는 도리어 사노 한 사람에게 한 개씩만 주라고 판결을 내렸다. 그래서 그 밤나무가 있는 산골짜기를 율곡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師旣出家 捨其宅爲寺 名初開 樹之旁置寺曰娑羅
원효스님은 출가하고 나서 그의 집을 희사하여 절로 만들어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고 했다. 그리고 원효스님이 태어났던 그 밤나무 곁에도 절을 지어 사라사(娑羅寺)라고 했다.


師之行狀云 是京師人 從祖考也
唐僧傳云 本下湘州之人 按麟德二年間 文武王割上州下州之地 置歃良州 則下州乃今之昌寧郡也 押梁郡本下州之屬縣 上州則今尙州 亦作湘州也
佛地村今屬慈仁縣 則乃押梁之所分開也
원효스님의 행장(行狀: 전기)에는 서울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 조부의 본거지를 따른 것이다.
당<승전(僧傳)>에는 본래 하상주(下湘州)사람이라고 했다. 살펴보건대[按] 당 고종 16년[麟德 2年] - 즉 문무왕 즉위 5년(A.D. 665) 중에 문무왕이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의 땅 일부를 떼어서 삽량주(歃良州)를 설치했으니, 하주는 바로 오늘날의 창녕군에 해당하고, 압량군은 본래 하주에 소속된 고을[屬縣]이다. 상주는 지금의 상주(尙州)이니 또한 상주(湘州)라고도 쓴다. [원효스님이 태어난] 불지촌은 지금 자인현(慈仁縣)에 속해 있으니 곧 압량군에서 나누어진 한 구역이다.


師生小名誓幢 第名新幢(幢者俗云毛也)
初母夢流星入懷 因而有娠 及將産 有五色雲覆地
眞平王三十九年 大業十三年丁丑歲也
生而穎異 學不從師
其遊方始末 弘通茂跡 具載唐傳與行狀 不可具載
唯鄕傳所記有一二段異事 
원효스님의 아명은 서당(誓幢)이요, 제명(第名)은 신당[新幢: <당>은 세속에선 털(毛)이라고 한다]이다. 당초 그 어머니는 별똥[流星]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나서 [스님을] 잉태했는데, 해산하려고 할 때에는 오색구름이 땅을 뒤덮었다.
스님의 탄생은 진평왕 즉위 39년, 수나라 양제 대업(大業) 13년(丁丑年: A.D. 617)에 있었다.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기가 남달라서[穎異] 스승을 모시지 않고 독력으로 배웠다. 그가 수도를 위해 사방으로 구름 가는 듯한 행적[遊方]의 시말과 불교의 홍통(弘通)에 남긴 그의 성대한 업적은 당<승전>과 그의 행장에 모두 실려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일일이 다 지적하지 않고, 단지 <향전(鄕傳)>에 실린 한두 가지의 특이한 일만을 기록하겠다.


師嘗一日風顚唱街云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人皆未喩 時太宗聞之曰
此師殆欲得貴婦 産賢子之謂爾 國有大賢 利莫大焉
어느 날, 스님은 춘의(春意)가 발동하여[風顚] 다음과 같은 시가를 지어 부르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沒柯斧]를 주려나,
    하늘 받칠 기둥[支天柱]을 찍어내련다.


사람들은 모두 이 시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지 못했다. 다만 그때 태종 무열왕이 듣고서 말했다.
"이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구나. 나라에 훌륭한 인물이 있으면 이익이 그보다 클 수가 없지!"


時瑤石宮(今學院是也)有寡公主 勅宮吏覓曉引入
宮吏奉勅將求之 已自南山來過蚊川橋(沙川 俗云牟川 又蚊川 又橋名楡橋也)遇之 佯墮水中濕衣袴
吏引師於宮 褫衣曬㫰 因留宿焉
그때 요석궁[지금의 학원(學院)이 그곳이다]에 홀로 된 공주가 있었다. 무열왕은 궁리(宮吏)를 시켜 스님을 찾아 요석궁으로 인도해 들이게 했다. 궁리가 왕명을 받들고 원효를 찾아 다니다가, 이미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사천>이니, 속담에는 <모천> 또는 <문천>이라 하고, 다리 이름은 유교(楡橋)라 한다]를 지나는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일부러[佯] 물에 빠져서 함빡 옷을 적셨다. 궁리는 스님을 요석궁으로 데리고 가 거기서 옷을 끌러 말리도록 했다. 이리하여 스님은 그 요석궁에 유숙하게 되었다.


公主果有娠 生薛聰
聰生而睿敏 博通經史 新羅十賢中一也
以方音通會華夷方俗物名 訓解六經文學 至今海東業明經者 傳受不絶
요석공주는 과연 임신을 하더니 설총(薛聰)을 낳았다. 설총은 천생(天生)의 자질이 영민했다. 널리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통달했으니 신라 10현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방음[方音: 우리나라 말. 여기서는 <이두>를 가리킴]으로 중국과 우리나라[華夷]의 풍속과 사물 이름에 통회(通會)하고 육경(六經) 문학을 훈해(訓解)하여 오늘에 이르도록 이 땅의 경서 수업자[業明經者]들이 전수하여 이어 오고 있다.


曉旣失戒生聰 已後易俗服 自號小姓居士
偶得優人舞弄大瓠 其狀瑰奇 因其形製爲道具 以華嚴經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 命名曰無碍 仍作歌流于世
嘗持此 千村萬落且歌且舞 化詠而歸 使桑樞瓮牖玃猴之輩 皆識佛陀之號 咸作南無之稱 曉之化大矣哉
원효스님은 이미 파계하여 총을 낳은 뒤로는 세속의 복장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사기에는 <小性居士>로 되어 있음]라 일컬었다. 우연히 광대[優人]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형상이 진기했다. 스님은 광대의 그 박의 형상을 따라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의 <一切無碍人 一道[一乘]出生死>에 의거하여 무애(無碍)란 이름으로 그 도구를 명명하고 거기에 해당하는 노래 <무애가>를 지어 세상에 퍼트렸다.
일찍이 이 도구를 가지고 스님은 많은 촌락을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추고 널리 교화를 펼치고 돌아왔다. 이리하여 저 오두막집의 더벅머리 아이들[桑樞瓮牖玃猴상추옹유확후]까지도 모두 불타의 명호를 알게 하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부르게 했으니, 원효스님의 교화는 참으로 크기도 하다.


其生緣之村名佛地 寺名初開 自稱元曉者 蓋初輝佛日之意爾 元曉亦是方言也 當時人皆以鄕言稱之始旦也
그가 태어난 마을을 불지촌이라 이름하고, 그의 집을 희사하여 만든 절을 초개사라 이름하고, 그리고 또 자칭 원효(元曉)라고 한 것들은 모두 불일(佛日)을 처음으로 빛나게 했다는 뜻이다. 원효라는 말도 또한 우리나라 말[方言]에서 뜻이 취해진 것이니 당시 사람들은 모두 우리나라 말[鄕言]로써 [원효스님을] 새벽[始旦]이라고 불렀다.


曾住芬皇寺 纂華嚴䟽 至第四十廻向品 終乃絶筆
又嘗因訟 分軀於百松 故皆謂位階初地矣
亦因海龍之誘 承詔於路上 撰三昧經疏 置筆硯於牛之兩角上 因謂之角乘 亦表本始二覺之微旨也 大安法師排來而粘紙 亦知音唱和也
일찍이 분황사(芬皇寺)에 머물러 있으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저술했는데 제4권 십회향품(十廻向品)에 이르러 그만 붓을 그쳤다. 또 언젠가는 공적인 일[公]로 인해서 몸을 일백 소나무[百松]에 나누었으므로 모두들 위계(位階)의 초지(初地: 환희지)라고 일렀다. 스님은 또한 바다용의 권유에 의하여 노상에서 조서(詔書)를 받고 <금강삼매경소(金剛三昧經疏)>를 저술했다. 그것을 저술할 때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아 두고 했다고 해서 그것을 각승(角乘)이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각승이란 또한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오묘한 뜻이 숨어 있는 것이다. 대안(大安)법사가 와서 종이를 붙였으니[경의 차례를 매김] 역시 의미를 알고 둘이서 주고받은 것[知音唱和]이다.


旣入寂 聰碎遺骸 塑眞容 安芬皇寺 以表敬慕終天之志 聰時旁禮 像忽廻顧 至今猶顧矣
曉嘗所居穴寺旁 有聰家之墟云
스님이 입적하자 아들 총은 그 유해를 가루내어서 진용(眞容)을 만들어 분황사에 봉안해 두고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흠모의 뜻을 표했다. 설총이 그때 스님의 소상(塑像) 곁에서 배례했더니, 소상이 홀연 돌아다 보았다. 지금도 소상은 여전히 돌아다 보는 모습 그대로 있다.
원효스님이 일찍이 거처한 적이 있던 혈사(穴寺) 곁에 설총의 집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


讚曰 
角乘初開三昧軸  舞壺終掛萬街風
月明瑤石春眠去  門掩芬皇顧影空 廻顧至
그를 찬(讚)한다.
각승(角乘)을 지어 삼매경의 중추되는 뜻 처음 열어 보이고
표주박 들고 춤을 추며 거리마다 교화를 베풀었네.
달 밝은 요석궁에 봄잠이 깊더니
문 닫힌 분황사엔 돌아다 보는 모습만 남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