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가르침에서는 나라는 것이 사실은 없는 것이라는 무아를 알려주십니다.
즉 나라고 부를 만한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또한 나라는 존재는 죽고 태어나고를 반복한다는 윤회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 두 개념은 모순같아 보입니다.
대체 존재하지 않는 내가 어떻게 윤회를 한다는 말일까요?
이런 질문은 불교의 개념을 피상적으로 이해했을 때 나타납니다.
바르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했다면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일에는 항상 과정과 결과가 있기 마련입니다.
무아란 결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나'라고 부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아를 깨닫기 전에는
내가 있다는 '한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 생각의 결과로 그 생각이 만들은 '내가' 계속 몸을 받는 윤회의 과정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전체적인 흐름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 무명(無明 avijjā)입니다.
우리가 무명 상태에 있는 이유는 너무나 오래 전에 명(明 vijjā)의 상태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법화경의 궁자의 비유에서는 50년 전 어린 시절에 집을 나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도 못알아보고 내 집이 어디인지도 모릅니다.)
무아(無我)로 번역되는 빨리어는 anatta입니다.
anatta란 'atta(我)가 아니다(부정 접두어 an)'란 의미입니다.
그리고 atta란 자아 즉 '변치않는 나라는 것의 핵심'을 뜻합니다. 요즘 말로는 영혼 쯤이 되겠지요.
anatta: [adj.] soul-less. (m.), non-egoanatta, 無我的
그러므로 anatta란 변치 않는 나라는 것이 없음을 뜻합니다.
이런 가르침이 있은 지가 2600년이 지났건만 우리는 변치않는 영혼이 있다고 믿습니다.
윤회를 한다고 말한다면 영혼을 상정할 수 밖에는 없지 않느냐고요?
전생의 내가 한 행동이 현생의 내게 영향을 주고 있고
또한 현생의 내 신구의 삼업이 내생에 영향을 준다면
그 업을 지어서 받는 '무엇'이 존재해야 하는 것 아닌냔 말이겠지요.
그렇습니다. 그 에너지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에너지는 고정 불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무엇을 부처님께서는 '업의 상속자(kammadāyādā)'라고 하셨습니다.
dāyāda : [m.] inheritance. (adj.) (in cpds.) inheriting,
相続人, 繼承人
즉 인과를 계속 연결하는 '존재'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 중생들은 영혼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바로 그 '영혼'이라 부르는 것이 사실은 한 생각의 산물임을 깨달으신 것입니다.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라고 하는 한 생각에서 이 모든 것(일대사인연)이 시작되었음을 깨달으신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펼쳐지는 '바탕'이 존재해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그 무량한 바탕을 '나'라는 개념으로 제한한 것이 결국 문제를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그 무량한 바탕이 법신불입니다.
그런데 스스로가 스스로를 좁게 제한하니 그 무량한 바탕은 제한된 화신으로 몸을 나투게 되고
그 제한된 화신들이 드라마를 엮어서 그 응보로 여기에 보신으로 이 몸이 존재하게 됩니다.
이런 이해가 있어야 '나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라는 말이 이해가 됩니다.
만약 우리가 윤회의 존재라면 나는 누구일까요?
전생의 내가 나인가? 아니면 현생의 내가 나인가? 아니면 미래생의 내가 나인가?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내가 경험한 것으로 구성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내게는 자유의지가 있어서
'내' 선택에 따라서 내 모습은 과거 현재 미래로 계속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즉 '고정된 실체의 내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만약 영혼이란 고정 불변의 것이고 따로 존재한다면
그 영혼이란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되며
내가 이 세상에서 신구의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아무 영향을 받지 않게 됩니다.
이런 생각은 모든 일이 우연히 일어난다라는 생각과 비슷하지만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에 비추어 볼 때 별로 신빙성이 없어 보입니다.
만약 영혼이 나의 신구의 삼업에 영향을 받는 것이라면
영혼이란 고정 불변이 아니며 조건에 따라서 변화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 '나의 영혼'이란 과연 무엇이냔 말이죠?
결국 나의 영혼이란 안이비설신의로 경험되는 세상을 겪은 것의 총합이 될 것입니다.
이 말은 결국 나라는 것은 나의 선택이 결정하는 것이며, '고정된 실체의 나는 없다'라는 것입니다.
즉 경험하는 자는 있지만 우리 중생이 생각하는 '나'라는 개념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anatta를 무아(無我)가 아니라 비아(非我)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비아란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짜 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비아의 문제는
'착각한 내'가 내가 아니라면 진짜 내가 있다는 말이 된다는 점입니다.
세존께서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만약 그 경험을 인식하는 데에서 '나'를 개입시키지 않을 수 있다면
즉 나라는 생각을 멈출 수 있다면 어떻게 되는가?
오직 가면 갈 뿐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무아란 선정의 깊은 단계에서 체험되는 것으로 저는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위와 같이 알음알이로도 설명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만약 우리가 한 생각을 일으킨다면
우리는 그 에너지를 따라가게 됩니다.
그게 윤회입니다.
그런데 그 에너지를 꺼버리면 더이상 윤회를 하지 않습니다.
그게 해탈이고 열반입니다.
우리는 무아이기 때문에 열반할 수 있습니다.
혹자가 이런 글을 잘못 읽고
일단 세상을 내 감각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면서 대충 살고
마지막 죽을 때 무념으로 대처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일으킬 소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리석은 '한 생각'일 뿐입니다.
그런 생각의 바탕에는 나란 놈이 펄~펄 살아있습니다.
결코 윤회를 벗어날 수 없을 뿐더러 지은 업장을 그대로 받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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