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가르침의 사식 중 4번째인 식식(識食 viññāṇāhāro)을 볼 차례입니다.
식(識 viññāṇā)이란 판단을 내리는 것(vijānāti; knows; understands)입니다.
이 비유에서는 모든 식(識 판단)이란 것은 괴로움이라고 알려주시는 것 같습니다.
나라는 자아가 생기고
그래서 어떤 견해가 생겨서
의도를 일으켜서 (감각적인 욕망을 만족시키는) 행동을 해 보지만
그 결과를 판단해 보면 오점 투성이의 괴로움 덩어리라는 것입니다.
과거를 살펴보아도 그렇고, 현재를 살펴보아도 그러하며, 미래를 살펴보아도
육근을 갖고 산다는 것은 괴로움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아침에 창에 백번을 찔리고, 한낮에 창에 백번 찔리고, 해질녁에 창에 백번 찔리는 것과 같다는 가르침입니다.
S12:63 아들의 고기 경을 번역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경전에 쓰여져 있는 글의 시점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서 의미가 완전히 반대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부처님의 시점과 중생의 시점은 정 반대이기 때문에
주어를 잘못 상정하면 영 엉터리 번역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번 비유도 그 경우에 들어가게 됩니다.
만약 부처님 시점이라면 판단(식)이란 괴로움이니 그렇게 알라는 말씀이 됩니다.
즉 식식이란
우리 중생이 싫다 좋다 판단을 내리면서 '식식(판단이라는 음식)'을 삼키는데
사실은 그 판단 모두가 창에 찔리는 괴로움이란 것을 모른다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 판단들이란 것은 결국 다시 촉의 삼사화합(근-경-식의 만남)에서 식(견해)이되며
이런 견해는 결국 또 다른 의도를 일으켜서 감각적인 욕망을 추구하고 그 결과 다시 판단을 일으키는 악순환의 연속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시점이라면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계속 판단만 내리고 있을 뿐입니다.
우암은 그렇게 읽었습니다.
각묵스님의 번역
8. "비구들이여, 그러면 알음알이의 음식은 무엇과 같다고 봐야 하는가?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죄를 지은 도둑을 붙잡아 '폐하, 이 자는 죄를 지은 도둑입니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처벌을 내리십시오.'라고 하면서 대령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왕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봐라, 그렇다면 너희들은 가서 아침에 백 개의 창으로 찔러라.' 그러면 그들은 아침에 그 사람을 백 자루의 창으로 찌를 것이다.
다시 왕은 한낮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봐라,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느냐?' '폐하, 아직 살아있습니다.' 그러면 왕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가서 한낮에 백 개의 창으로 찔러라.' 그러면 그들은 한낮에 그 사람을 백 자루의 창으로 찌를 것이다.
다시 왕은 해거름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봐라,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느냐?' '폐하, 아직 살아있습니다.' 그러면 왕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가서 해거름에 백 개의 창으로 찔러라.' 그러면 그들은 해거름에 그 사람을 백 자루의 창으로 찌를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사람은 삼백 자루의 창에 찔려서 그 때문에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겪겠는가?"
"세존이시여, 한 개의 창에 찔려도 그 때문에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겪을 것인데 삼백 자루의 창에 찔린 것은 다시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비구들이여, '알음알이의 음식은 이와 같다고 봐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알음알이의 음식을 철저히 알 때 정신, 물질을 철저히 알게 되고, 정신, 물질을 철저히 알 때 성스러운 제자가 더 이상 해야 할 바가 없게 된다고 나는 말한다."
현재로선 우암의 번역은 각묵스님 번역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제 나름 번역해 보려 했으나 아직은 역부족입니다. 그래서 제 번역은 생략합니다.
더 공부가 되서 의미가 확연해 지면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비유에서 우암이 주목했던 점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글에서 왕이라고 하신 단어는 raññā인데 일반적으로 왕이라면 raja를 쓸텐데 최상의 지혜인 aññā가 들어간 단어를 사용하셨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또한 왕의 호칭이 deva로 신처럼 보이기는 합니다만 왕을 deva라 부르기도 한다고 합니다. 왕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우암에게는 불명확합니다. 윤회에 들어있는 인간의 갈 곳을 결정하는 존재라는 느낌이 듭니다만 그래서 deva란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한편 '시간의 문제를 왜 말씀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pubbaṇhasamayaṃ 를 아침으로
majjhanhikasamayaṃ을 한낮으로
sāyanhasamayaṃ을 해거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인생의 초년, 중년, 말년을 말씀하시련느 것인지, 아니라면 전생, 현생, 미래생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그 어느 때라도 viññāṇā란(판단을 해 본다면) 괴로움이란 말씀을 하시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창에 백번 찔린다는 표현은 sattisatena인데 satti가 능력 혹은 창이란 의미의 단어인데
저는 satta 즉 중생의 의미로 풀어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해 보아도 별로 와 닿는 의미가 없더군요.
satena는 백번으로 보려면 sata + ena (字尾: a<>ena 陽性%单数%具格)로 백번을 이용해서가 되고
만약 mindful; conscious (深切注意的,有意识的 생각을 하는)로 푼다면 생각을 하는 것을 통해서가 됩니다
그래서 첫째로 풀어보면 '백번 창에 찔려서'가 되지만
두번째 의미로 풀어본다면 '중생이라는 생각으로'가 됩니다. 중생이란 살아가면서 수 없이 (백번) 판단을 내리면서 좋다 싫다를 반복하는 모습을 표현하신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리고 이런 판단을 내리는 것을 식을 삼킨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이구요.
(참~! 글을 쓰면서도 그 의미를 몰랐네요.^^ 이 글을 써 놓고는 왜 창에 백번 찔린다는 표현을 쓰셨을까?하고 계속 석연치가 않았었는데 이제야 이해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은 말 그대로 입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판단을 내리고 있었는데, 언제나 늘상 그래왔기 때문에 그런 제 모습을 못봤더군요. 눈 앞의 대상에 대해서 언제나 좋고 나쁘고 알고 모르고를 계속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더군요. 그래서 그런 모습이 계속해서 수도 없이 반복되기 때문에 백번 찔린다는 말씀으로 표현하신 것 같습니다. 진짜로 말 그대로 우리는 눈 앞에 펼쳐지는 경계에 대해서 계속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 판단을 삼키고 있는 것입니다.)
상윳다 니까야에 보면 S56:35 백 자루의 창 경(Sattisata-sutta)이 있습니다.
이 경에서는 창으로 백년간 아침 점심 저녁으로 각 백번씩 매일 찔리지만 그 결과 사성제를 알 수 있다면 그게 더 좋은 것이라고 알려주십니다. 이 의미는 '창에 매일 찔리는 것이 사성제로 가는 의미임을 알라는 말씀인가?'하는 생각이 들게합니다. 또한 금강경 제16 능정업장분(能淨業障分)에 나타나는 천대와 멸시를 당하는 것이 바로 창에 매일 백번을 찔리는 일이라고 판단해 볼 수도 있습니다.
復次 須菩提 善男子善女人 受持讀誦此經 若爲人輕賤
부차 수보리 선남자선여인 수지독송차경 약위인경천
是人 先世罪業 應墮惡道 以今世人 輕賤故先世罪業
시인 선세죄업 응타악도 이금세인 경천고선세죄업
則爲消滅 當得阿縟多羅三藐三菩提
즉위소멸 당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또한 수보리여! 이 경을 받아지니고 읽고 외우는 선남자 선여인이 남에게 천대와 멸시를 당한다면,
이 사람이 전생에 지은 죄업으로는 악도에 떨어져야 마땅하겠지만,
금생에 다른 사람의 천대와 멸시를 받았기 때문에
전생의 죄업이 소멸되고 반드시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아뇩다라삼먁삼보리)을 얻게 될 것이다."
유사한 비유가 가시의 비유입니다. S35:244 괴로움을 일으키는 법 경에 나타나는데 창의 비유와 다른 점은 동시성입니다. 창의 비유에서는 아침, 한낮, 해질녁으로 시간에 따라서 비유해 주시지만 가시의 비유에서는 동시에 사방 팔방으로 피할 수 없는 가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경도 이 글 말미에 붙여놓았습니다.
창에 백번 찔린 사람이 살아있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는 살아있습니다. 따라서 창에 백번 찔린다는 의미는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윤회하는 중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계속 생을 살면서 고통을 겪게 되지요. 즉 일반인들이 두려워하는 존재의 단절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존재는 늘 고통을 겪는다는 문제에 직면한다는게 심각한 문제점이지요.
어쨌든 왕은 그의 상태를 묻고는 살아있음을 알고는 gacchatha라는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각묵스님께서는 이 단어를 어떻게 번역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배고픔으로(chāta) 갔구나(ga).'라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배고픔이란 갈애와 같은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혹은 chatta란 의미로도 볼 수 있습니다. 우산의 의미입니다. 햇빛이 가려진 상태? 혹은 더 나아가 6개의 내입처를 가진 것이란 생각도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gacchatha를 한 결과 hanathā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haneyyuṃ하게 됩니다. 매를 맞던지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haneyyuṃ = ( haneyya + uṃ ) 字尾: a<>uṃ 主动态(act.)%复数(p.)%过去式(aor.),愿望/可能(opt.)%人称(3)
hāna:n. [〃<hā] 退, 退失, 捨棄
han, (梵han)﹐【字根I.】杀(to kill),打(to beat)。【字根III.】被杀(to be killed)
빨리어 원문
Kathañca, bhikkhave, viññāṇāhāro daṭṭhabbo?
Seyyathāpi, bhikkhave, coraṃ āgucāriṃ gahetvā rañño dasseyyuṃ: ‘ayaṃ te, deva, coro āgucārī, imassa yaṃ icchasi taṃ daṇḍaṃ paṇehī’ti. Tamenaṃ rājā evaṃ vadeyya: ‘gacchatha, bho, imaṃ purisaṃ pubbaṇhasamayaṃ sattisatena hanathā’ti. Tamenaṃ pubbaṇhasamayaṃ sattisatena haneyyuṃ. Atha rājā majjhanhikasamayaṃ evaṃ vadeyya: ‘ambho, kathaṃ so puriso’ti? ‘Tatheva, deva, jīvatī’ti. Tamenaṃ rājā evaṃ vadeyya: ‘gacchatha, bho, taṃ purisaṃ majjhanhikasamayaṃ sattisatena hanathā’ti. Tamenaṃ majjhanhikasamayaṃ sattisatena haneyyuṃ. Atha rājā sāyanhasamayaṃ evaṃ vadeyya: ‘ambho, kathaṃ so puriso’ti? ‘Tatheva, deva, jīvatī’ti. Tamenaṃ rājā evaṃ vadeyya: ‘gacchatha, bho, taṃ purisaṃ sāyanhasamayaṃ sattisatena hanathā’ti. Tamenaṃ sāyanhasamayaṃ sattisatena haneyyuṃ. Taṃ kiṃ maññatha, bhikkhave, api nu so puriso divasaṃ tīhi sattisatehi haññamāno tatonidānaṃ dukkhaṃ domanassaṃ paṭisaṃvediyethā”ti? “Ekissāpi, bhante, sattiyā haññamāno tatonidānaṃ dukkhaṃ domanassaṃ paṭisaṃvediyetha; ko pana vādo tīhi sattisatehi haññamāno”ti.
“Evameva khvāhaṃ, bhikkhave, viññāṇāhāro daṭṭhabboti vadāmi. Viññāṇe, bhikkhave, āhāre pariññāte nāmarūpaṃ pariññātaṃ hoti, nāmarūpe pariññāte ariyasāvakassa natthi kiñci uttarikaraṇīyanti vadāmī”ti.
cora : [m.] a thief; robber corayati to steal, 賊, 盜賊
āgucārī : [m.] a criminal; a villain «āgu+cara+ṇī»
āgu :Guilt, offence, crime, --cārin one who does evil
gahetvā : [abs. of gaṇhāti] having taken; having held of; having seized
gaṇhāti : [gah + ṇhā] takes; holds of; seizes
raññā :(rañño)see rājā 최상의 지혜? 왕의
iccha: [adj.] (in cpds.), wishing; longing; desirous of
daṇḍa : [m.] 1. a stem, stick, cudgel, walking stick, timber (in general), 2. a fine, punishment, 杖, 棒, 罰, 刑罰, 罰金
paṇehi: [paṇa+ṇe+hi] 생명체로 드러나야 한다?
gacchatha 여섯이 머무는 곳에 갔구나! 갈애로 갔구나!
chāta : [adj.] hungry
chatta : [nt.] umbrella; sunshade; the royal canopy
bho : [ind.] (a familiar term of address), my dear; friend
satti : [f.] 1. ability; power; strength; 2. a spear; a dagger 이걸 창이라 함!
ena 陽性%单数%具格
sattisatena 창에 백번 찔려, 능력을 도구 삼아? 중생이라는 생각을 도구삼아?
hanati : [han + a] kills; strikes; injures
Hāna ,(nt.) [fr. hā, cp. Sk. hāna] relinquishing, giving up, falling off; decrease, diminution, degradation
ambho :Oh! I say!。
kathaṃ : [adv.] how? kathaṃkathā : [f.] doubt; uncertainty
divasa : [m.] day
diva : [m.] heaven
haññamāna: [pr.p. of haññati] killing
haññati : [han + ya] is killed or destroyed haññana
S35:244 괴로움을 일으키는 법 경 (Dukkhadhamma-sutta)
6.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그렇게 행동하고 그렇게 머묾으로 해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이라는 나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이 더 이상 그에게 잠복하지 못하도록 행동하고 머무는 방법을 깨닫게 되는가?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많은 가시가 있는 숲에 들어간다 하자. 그러며 그의 앞에도 가시요, 뒤에도 가시요, 왼쪽에도 가시요, 오른쪽에도 가시오, 아래에도 가시요, 위에도 가시일 것이다. 그는 ‘제발 가시가 나를 찌르지 않았으면!’이라고 하면서 마음 챙겨서 나아갈 것이고 마음 챙겨서 물러날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면 성자의 율에서는 이를 일러 가시라 한다.”
7. “이를 가시라고 안 뒤 단속과 단속하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Kathañca, bhikkhave, bhikkhuno cāro ca vihāro ca anubuddho hoti, yathā carantaṃ viharantaṃ abhijjhādomanassā pāpakā akusalā dhammā nānussavanti?
Seyyathāpi, bhikkhave, puriso bahukaṇṭakaṃ dāyaṃ paviseyya. Tassa puratopi kaṇṭako, pacchatopi kaṇṭako, uttaratopi kaṇṭako, dakkhiṇatopi kaṇṭako, heṭṭhatopi kaṇṭako, uparitopi kaṇṭako. So satova abhikkameyya, satova paṭikkameyya: ‘mā maṃ kaṇṭako’ti. Evameva kho, bhikkhave, yaṃ loke piyarūpaṃ sātarūpaṃ, ayaṃ vuccati ariyassa vinaye kaṇṭako”ti.
Iti viditvā saṃvaro ca asaṃvaro ca veditabbo.
kaṇtaka : [nt.] a thorn; a bone; any instrument with a sharp point, 刺, 荊棘, 魚骨, 障碍
Dāya , wood; jungle, forest ( inflammable 타기 쉬운), a gift, donation; share, fee
bahukaṇṭakaṃ dāyaṃ 이 번역이 아마도 한문의 시다림(屍多林)으로 추정됩니다. (칠현녀의 법문) bahu가 많을 多, anta가 극단을 나타내는 시체 屍, dāya는 말 그대로 수풀 林. 그런데 시다림을 다른 한문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더군요. ① 시다(尸陀)는 산스크리트어 śīta의 음사, 한(寒)·냉(冷)이라 번역. 마가다국(magadha國)의 왕사성(王舍城) 부근에 있던 숲으로, 시체를 버리던 곳.
paviseyya = ( pavisati + eyya ) 字尾: ati<>eyya 主动态(act.)%单数(s.),复数(p.)%愿望/可能(opt.)%人称(3),人称(2),人称(1)
pavisati: [pa + vis + a] goes in; enters
paṭikkameyya : 되돌아 가다? kama의 반대 방향으로 가다?
S56:35 백 자루의 창 경(Sattisat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꼬삼비에서 심사빠 숲에 머무셨다.
2.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존귀하신 이여'라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3.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백 살의 수명을 가져 백 년을 사는 사람이 있다 하자. 이런 그에게 누가 말하기를, ‘이리 오시오, 착한 사람이여. 사람들이 아침에 그대를 백 자루의 창으로 찌르고, 한 낮에 그대를 백 자루의 창으로 찌르고, 해거름에 그대를 백 자루의 창으로 찌를 것이오. 착한 사람이여, 이처럼 그대는 매일매일 삼백 자루의 창으로 찔리면서 백 살의 수명을 가져 백 년을 살 것이오. 이렇게 백 년을 보내고 난 뒤에 그대가 아직 관통하지 못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관통하게 될 것이오.’라고 한다 하자. 비구들이여, 그러면 자신의 이로움을 추구하는 선남자는 이러한 제안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Seyyathāpi, bhikkhave, puriso vassasatāyuko vassasatajīvī. Tamenaṃ evaṃ vadeyya: ‘ehambho purisa, pubbaṇhasamayaṃ taṃ sattisatena hanissanti, majjhanhikasamayaṃ sattisatena hanissanti, sāyanhasamayaṃ sattisatena hanissanti. So kho tvaṃ, ambho purisa, divase divase tīhi tīhi sattisatehi haññamāno vassasatāyuko vassasatajīvī vassasatassa accayena anabhisametāni cattāri ariyasaccāni abhisamessasī’ti. Atthavasikena, bhikkhave, kulaputtena alaṃ upagantuṃ. Taṃ kissa hetu?
4. “비구들이여, 그 시작을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윤회이기 때문이다. 윤회의 처음 시작점은 창으로 찌르고 칼로 베고 도끼로 찍어서는 결코 식별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관통하는 것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이 함께 한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관통하는 것은 육체적 즐거움과 정신적 즐거움이 함께 한다고 나는 말한다. 무엇이 넷인가?
Anamataggoyaṃ, bhikkhave, saṃsāro; pubbā koṭi nappaññāyati sattippahārānaṃ asippahārānaṃ usuppahārānaṃ pharasuppahārānaṃ. Evañcetaṃ, bhikkhave, assa. Na kho panāhaṃ, bhikkhave, saha dukkhena, saha domanassena catunnaṃ ariyasaccānaṃ abhisamayaṃ vadāmi; api cāhaṃ, bhikkhave, sahāva sukhena, sahāva somanassena catunnaṃ ariyasaccānaṃ abhisamayaṃ vadāmi. Katamesaṃ catunnaṃ?
Paharaṇa ,(nt.) [fr. paharati] striking, beating
pahāra : [m.] a blow; a stroke, 打撃, 拍撃; 傷
asi: [m.] sword, 剣, 刀
sippa : [nt.] art; craft, 技術, 技芸 asippa: [na+sippa]
usu : [m.; f.] an arrow
pharasu : [m.] hatchet 斧头 (한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작은) 손도끼
abhisamaya : [m.] realisation; penetration 洞察,敏锐
우암에게 이 부분은 폭력을 사용해서는 인과 관계를 해체할 수 없다는 것으로 읽힙니다. 그렇기 때문에 '폭력으로는 괴로움과 정신적인 고통이 동반되고 네가지 성스러운 진리로 samaya (시간의 문제; 업연?)을 극복하지 못한다고 말한다.'라고 가르침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래서(폭력) 포기함으로써 (cāhaṃ???) 행복과 정신적인 평안이 동반되고 네가지 성스러운 진리로 samaya (시간의 문제; 업연?)를 극복한다고 말한다.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의 성스러운 진리이다.”
Dukkhassa ariyasaccassa … pe … dukkhanirodhagāminiyā paṭipadāya ariyasaccassa.
5.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수행해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수행해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수행해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이다.’라고 수행해야 한다.”
Tasmātiha, bhikkhave, ‘idaṃ dukkhan’ti yogo karaṇīyo … pe … ‘ay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yogo karaṇīyo”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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