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초선 및 이선 정형구의 심사(尋思)

우암(雨庵) 2016. 9. 24. 11:08

초선에서 나타나는 심사(尋思, vitakka vicāra)를 어떻게 보아야 할것인가 ?

도대체 '심사란 무엇일까?'하는 의문에 대해서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떠 올라서 글을 써봅니다.


심사(尋思)는 한글로 '사유와 숙고' 혹은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초선 정형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전재성박사님 번역


세상에서 수행승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여의고                           vivicceva kāmehi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vivicca akusalehi dhammehi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어,                                 savitakkaṃ savicāraṃ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vivekajaṃ pītisukhaṃ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합니다.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각묵스님 번역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불선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심(尋)]과 지속적인 고찰[사(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희(喜)과 행복[락(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무릅니다.


초선의 정형구에서 우암이 제일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은 바로 심사(尋思, vitakka vicāra)입니다.

초선에 들기 위해서는

감각적인 욕망들에서 멀어져야 하고 (viveka)

또한 선하지 않은 법에 대해서도 멀어져야 하지만

심사(尋思, vitakka vicāra)와 함께한다(sa)고 되어 있습니다. (savitakkaṃ savicāraṃ)

대체 심사란 무엇이고 어떤 심사와 함께해야 할까요?

다시말해 좌선을 하면서는 어떻게 해야 초선정에 들게될까요?


이 가르침의 의미를 생각해 보기 전에 먼저 vitakka vicāra의 우암은 파자를 이용한 분석을 해 보겠습니다.

vitakka의 의미를 '내'가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사물 및 사람들과 '분리'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또한 vicāra의 의미를 그 떠오른 대상에 대해서 '생각이 진행됨'이라고 이해했습니다.


vitakka : [m.] reflection; thought, 尋, 尋求, 覚, 思惟, 考想
ta : [demonstrative pron.] that; (so = he; sā = she; taṃ = that thing, are some forms of this)
ka : [from interrogative pron. kiṃ] who; what; which
takka : [m.] thought; reasoning; logic. (nt.), butter-milk, 思索, 思擇, 理論, 推論, 尋思
vicāra : [m.] investigation; management; planning, 伺, 伺察, 考察
cāra , (m.), motion; action; process; going, 修行實行的, 所行的


우암은 vitakka의 의미를 '내'가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사물 및 사람들과 '분리'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본 이유는 vitakka의 단어 구조를 vi + ta + ka 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vi란 분리를 의미하고, ta란 '그것' 즉 물건을 말하고, ka란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vitakka란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사물과 사람들을 나와 다르게 인식하는 것(분리)을 의미합니다.

이는 생각이 발생하는 구조를 보아도 당연합니다.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생각의 대상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상이 드러나려면 내게 인식된 그 대상이 다른 것으로 부터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분리를 뜻하는 vi가 앞에 붙어야 합니다.

또한 '내'가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나를 대상과는 다른 것으로 '분리'해서 본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이해해 본다면 vitakka란 마음 속에 생각의 대상이 나타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 속에 생각의 대상이 나타난 상태에서 vicāra가 진행됩니다.

우암은 vicāra의 의미를 그 떠오른 대상에 대해서 '생각이 진행됨'이라고 이해했습니다.

cāra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vicāra이므로 이는 그냥 행위가 아니라 분리된(vi) 행위입니다.

나와 남,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나와 남,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중생인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그렇게 생각하며 살고 있으니까요.

즉 다시말해 생각이 일어난다면 대상이 있고 주객이 분리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심사(생각)가 초선정 중에 일어난다고 하지만 그 생각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감각적인 욕망을 여의고 또한 불선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 중생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일에 대한 생각이란

그 대상의 99.99%가 아마도 감각적인 즐거움 혹은 그와 관련된 사람에 대한 적의, 미움, 서운함 등일 것입니다.

따라서 초선에서 나타나는 심사란 '세간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암이 생각하기에는 초선에서 나타나는 생각의 대상이란

아마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생각(法相 법상)이 아닐까하며

또한 자비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다 봄(善法선법)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사무량심인 자비희사가 중요해지는 것이구요.


그런데 초선 정형구에서 궂이 분리를 의미하는 vi를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이유는

후에 나타나는 "'나와 남,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를 드러내시기 위함이 아닐까?"라고 우암은 생각해 봅니다. 


즉 이선의 정형구에서 바로 심사(尋思, vitakka vicāra)에 대한 가르침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런데 초선과 다르게 이선에서는 심사가 조용해지고(vūpasama)

vitakka와 vicāra가 아닌 (즉 생각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닌) 삼매에서 오는 희열과 행복을 말씀하십니다.


이선의 정형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전재성 박사님 번역


세상에서 수행승은
사유와 숙고가 멈추어진 뒤,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
내적인 평온과 마음의 통일을 이루고,                  ajjhattaṃ sampasādanaṃ cetaso ekodibhāvaṃ
사유를 뛰어넘고 숙고를 뛰어넘어,                       avitakkaṃ avicāraṃ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samādhijaṃ pītisukhaṃ
두 번째 선정을 성취합니다.                                du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각묵스님 번역


일으킨 생각[심(尋)]과 지속적인 고찰[사(伺)]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을 구족하여 머무릅니다.


우암의 생각


세상에서 수행승은
사유와 숙고가 잦아든 뒤,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
내적으로 명징해지고 마음이 존재와 하나가 되어,      ajjhattaṃ sampasādanaṃ cetaso ekodibhāvaṃ
사유와 숙고가 없이,                                                avitakkaṃ avicāraṃ
삼매의 희열과 행복을 느끼는                                   samādhijaṃ pītisukhaṃ
두 번째 선정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du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vūpasama : [<vi-upa-śam, BSk. vyupaśama][m.] relief; clamness; cessation

sampasādanaṃ : making serene, tranquillization

pasādana : happy state, reconciliation, purity, 明浄, 澄明, 明朗, (집으로 향하다.)

sādana :n. [〃<sad] place, a house, 居所, 住所

dāna : [nt.] gift; charity; alms; alms-giving 施, 布施, 施与
ekodibhāva: [m.] onepointedness; concentration 존재를 하나로 만든다. 존재와 하나가 되다.


우암도 내적으로(ajjhattaṃ)란 표현을 사용했지만 사실 이 부분은 더 '파격적'으로 이해해보고 싶습니다.


ajjhattaṃ sampasādanaṃ cetaso ekodibhāvaṃ를 다시 생각해 보면

"현생(ajjha; 오늘)의 나(attaṃ)와 관련되어 모두(sam) 집으로(sādanaṃ 혹은 함께 보시하는 것으로) 향하게 되어(pa) 마음이 존재와 하나가 되어"라고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우암이 이해한 바대로 쉽게 풀이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초선의 (현생에 괸련된) 법상(法相) 및 선법(善法) 조차 모두 내려 놓으니 마음이 존재와 하나가 된다.'


이런 상태가 바로 사유와 숙고가 없는 상태입니다. 즉 avitakkaṃ avicāraṃ 입니다. (a는 부정 접두어입니다)

이것이 바로 삼매의 희열과 행복입니다.


'생각이 없다'는 것의 의미가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 조차 모른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 의미란 마음의 대상이 생각이 아니라 '지금 여기'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여기'에 가치 판단이 들어간다면 그건 더 이상 지금 여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걸으면 걸을 뿐!'이 되는 것입니다.


우암이 이해하기로는 sati(念 깨어 있음)란 생각이 아닙니다.

'생각(가치판단)이 개입되지 않은' 알아차림입니다.

더 나아가 sati를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함께하는(sa) '그런 일이 일어났구나'(ti)!"라고 파자를 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풀이라면 sati가 동아시아 불교의 개념으로는 관세음보살이 되는 것이겠지요.


다시 정리해 본다면
초선은 좌선을 하는데 있어 법상과 선법을 갖고 좌선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선이란 그 법상과 선법조차 내려 놓고 하는 좌선입니다.

만약 비법상과 불선법을 갖고 있다면
감각적인 욕망을 추구하고 이리 저리 계교를 꾸미느라
마음이 생각이라는 대상을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래서 마음은 대상에 묶여서 쉴 수 없을 것입니다.
마음이 쉴 수 없으니 평정함은 올 수 없을 것입니다.

금강경 第六 正信希有分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그러기에 여래가 항상 ‘너희 비구들은 나의 설법을 뗏목같이 여기라’ 하였나니,
법상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비법상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