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금강경(金剛經)에서 수보리가 한 질문의 내용

우암(雨庵) 2016. 10. 26. 14:02

우암이 이해한 바에 따르면

금강경에서 수보리가 석가모니 부처님께 드린 질문을 현대어로 바꿔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보신 진리(우리 존재의 실상)에 따르면 우리 중생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世尊이시여 善男子善女人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니는

應云何住며 云何降伏其心하리잇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란 위 없는 완전한 깨달음이란 말입니다.

anuttara : [adj.] incomparable; unsurpassed 無上的

uttara : [adj.] higher; further; northern; over. (nt.), an answer; reply, 更上的, 更優(秀)的, 北的, 北方的

sammāsambodhi 無上正等覺


"위 없는 완전한 깨달음(진리)을 얻고자 한다면

어떻게 머물러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합니까?"를 우암은 단순히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로 바꾸었습니다.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이란 문장에 대해서 도올선생인가가(?) 순서가 바뀌었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먼저 마음을 항복 받고 나서(바른 가치관을 세우고 나서) 그 가치관에 따라서 산다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으로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이란 문장을 이해한다면 순서가 바뀐 것이 맞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알지 못해서 엉뚱한 의문을 품은 것입니다.

위와 같은 생각은 그저 云何住(어찌 머물 것인가?)에 불과합니다.

이를 팔정도에 비추어 본다면 '정견-정사유-정어-정업-정명'의 단계입니다.



'



우암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하면

그런 '생각'은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응당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의 내용과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즉 불교의 "최종" 목표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머무는 바 없음입니다.

"어떤 곳"에 머물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가치관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생, 현재생, 미래생을 잘 살아가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 잘 사는 생에 머물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뛰어 넘는 것(내려 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머무는 바가 없어지기 위해서는 일단 부처님께서 알려주신 '법상(바른 삶; 정견-정사유-정어-정업-정명)'에 머물러야 합니다. 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서 머무는 바가 없어짐이 실현됩니다.

' 머무는 바가 없어진다는 것'은 어떤 고정된 형태(명사)가 아니고 '상태'(동사)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에서는 마음이 '바르고 맑은 곳에' 머물러야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머무름에서 조차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보리가 누굽니까? 이미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는 10대 제자 중 공에 대한 이해가 가장 뛰어난 분(解空第一)이 아닌던가요?

그런 분께서 질문의 순서를 헷갈릴 수는 없지 않을까요?


어찌 머물러야 하는가(應云何住)란 '어떤 가치관을 지니고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지니고 있는 마음(그 가치관; 정견 및 그에 따른 바른 신구의 삼업)마저도 어떻게 해야 내려 놓을 수 (그 생각에서 풀려날 수) 있겠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즉 처음에는 부처님 가르침으로 법상(法相)을 일으켜 (오계를 지키며 팔정도의 정견-정사유-정어-정업-정명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 법상마저 내려 놓고서 완전한 해탈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면 그 마음을 어떻게 내려 놓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다시 우암이 이해한 바대로 보다 구체적으로 적어 본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이시여, 우리 중생은 어떤 삶의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야 하며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 삶의 기준이라는 것 조차 뛰어 넘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수보리 존자가 묻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보리의 질문의 내용이 이렇기 때문에

어떤 분들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이미 法會因由分에서 보여지는 '부처님의 삶의 모습에 있다.'고 말씀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의 삶의 모습이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삶의 모습을 따라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위 질문에 대한 답이라는 것이겠죠.


金剛經

法會因由分 第一

如是我聞하사오니 一時에 佛이 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하사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으로 俱하시니라
爾時에 世尊이 食時에 著衣持鉢하시고 入舍衛大城하사
乞食하실새 於其城中에 次第乞已하시고 還至本處하사
飯食訖하시고 收衣鉢하시며 洗足已하시고 敷座而坐하시니라


제 1. 법회가 열린 인연[法會因由分]

이와 같은 내용을 저는 들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의 기수(祇樹) 급고독원(給孤獨園)에서 일천 이백 오십 명의 큰스님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 때 세존께서는 공양(供養)을 드실 때가 되었으므로 가사(袈裟)를 입으시고 발우(鉢盂)를 들고 사위성(城)에 들어가서 걸식(乞食)하셨습니다. 그 성안에서 차례대로 걸식하여 마치시고 본 곳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공양을 마치신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