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

우암(雨庵) 2016. 9. 8. 15:33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여실지견 如實知見)'는 것은 가능할까요?

또한 '무엇'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일까요?

'있는 그대로 본다'의 빨리어는 yathā-bhūta-ñāṇa-dassana로 나타납니다.


yathā : [adv.] as; like; in relation to; according to; in whatever way; just as, [yā+a+tha]

ya: [relative pron.] which; what; whatever

atha : [ind.] then; and also

ṭhā : (梵sthā)﹐【字根I.】停留(to stay),站著(to stand)

bhūta : [pp. of bhavati] become; existed, grown, born, produced
bhavati : [bhu + a] becomes; to be; exists

bhū : [f.] the earth, being, (n.) creature, living being, ① n. 生物. -hata殺生者. -hana 生類を殺す. ② f. [= bhūmi] 土地, 大地. loc. bhuvi

ñāṇa-dassana는 알고 본다로 해석하면 됩니다.


따라서 yathā-bhūta-ñāṇa-dassana란 무엇이든지 그것을 생겨난 원인과 결과를 (형성 과정을) 알고 보게된다는 뜻입니다. 즉 '나는 여기에서 왜 이렇게 살게 된 것인지 그 인과를 알고 보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하고 우암은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란, 우암이 생각하기에는, 숙명통(나의 전생을 봄)과 천안통(하늘 사람의 눈으로 다른 이의 운명을 알게 됨)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bhūta를 '생겨나서 형성되게 된'으로 읽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선정에 들고나서야 이런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건 세상의 다양한 이치를 관찰해 보고 추론해서 안다는 뜻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직접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를 '생생하게' 볼 수 있을까요?

이와 관련해서는 한 물리학자 분께서 해주신 말씀이 생각 나는군요.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일은 물리학적으로 볼 때, 당연히 과거로도 되돌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시간(t)을 마이너스로 놓으면 일어난 일의 반대 현상이 발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동영상을 거꾸로 돌리는 것 처럼 말이죠.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죠. 이런 예를 통해서 우암이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이렇게 '과거 전생에 있었던 인연을 볼 수 있다.'는 것(숙명통)은 과학적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조건이 아마도 깊은 선정인데 우린 그 방법을 잘 모른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런 논의의 연장선에서 볼 때, 미래도 볼 수 있고 따라서 운명이란 정해진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언제나 선택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선택지를 업과 무명에 따라서 하게 된다면 (마치 대다수의 중생이 인생을 살고 있듯이)

그 미래도 대강은 정해져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을 따라서 무상, 고, 무아의 삶을 살아간다면

내가 없으므로 그에 따른 나의 업장에서 풀려나겠지요. 따라서 미래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점쟁이가 과거는 잘 맞출 수 있어도 미래는 잘 못 맞추는 것은 아닐까요?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는 것은 수행 경지에서도 높은 경지에 속합니다.

상윳다 니까야 12:23 기반 경에 나타난 수행의 점차에 따르면

삼매를 얻고 나서야 비로서 그대로 알고 봄이 생겨나고

그렇게 세상을 알아야  비로서

세상에 대한 왜곡된 '전도몽상의 가치 판단 기준'을 싫어하게 되고 (nibbidā)

그래서 세상에 대한 탐욕에 물들지 않게 되어서 (virāga)

그래서 풀려나게 되고 (불이 꺼지게 되고) (vimutti)

그래서 멸진의 지혜가 생겨나 번뇌가 멸진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 경전 구성이 재미있는 이유는 오온인 색수상행식의 일어남(samudaya)과 사라짐(atthaṅgama)을 알아야 번뇌를 멸진시킬 수 있다고 알려주신 점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문단에서는 무명으로 부터 해탈까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따라서 색수상행식의 일어남이란 12연기를 통해서 괴로움이 일어남을 뜻하시고

색수상행식의 가라앉음이란 믿음에서 번뇌의 소멸까지를 뜻합니다.

그런데 색수상행식 오온이란 우리가 이것이 '나'인 줄 알고 살아가는 모습이므로

결국은 '아상'이 사라져서 무아(anattā)인 삶을 사는 것이 번뇌의 소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S12:23연유(기반) 경을 읽으실 때, 앞부분에 나타나는

'색수상행식의 일어남(samudaya)과 사라짐(atthaṅgama)을 알아야 번뇌를 멸진시킬 수 있다.' 만을 강조해서 본다면 이 경전은 위파사나 수행의 근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색수상행식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세세하게 관찰하면 번뇌를 멸진시킬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암의 생각으로는 앞서 설명드린 바와 같이
색수상행식의 일어남(samudaya)이 12연기이고
사라짐(atthaṅgama)이 믿음부터 시작되는 수행의 과정이므로
이러한 해탈의 과정을 부처님께서
색수상행식의 일어남(samudaya)과 사라짐(atthaṅgama)으로 설명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즉 '오온의 일어남을 관찰한다는 것'은 12연기의 진행 과정을 보는 것이지 감각기관을 최대한 예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을 깨어서(janata) 바라다 보라(passati)는 것이죠.
또한 '오온이 사라짐을 관찰한다는 것'은  수행과정에 대해 깨어서(janata) 바라다 보라(passati)는 것은 아닐까요? passati란 '깨어있음(sati)으로 향하다(pa)의 뜻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어느 분께서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를 우암의 이해와는 많이 다르게 해석을 하시는 것을 보고였습니다. 알고 보다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명확하게 안다.'라는 개념으로 설명을 해 주셔서 그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현미경이나 망원경으로 원자를 보거나 우주의 광대함을 보는 것이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우암이 이해하기로는 세간의 일은 모두 연기법으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 연기법을 명확하게 안다고 하는 의미는 
물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명확하게 안다.'라는 개념도 들어가겠지만
우암의 이해로는 그 보다 훨씬 폭이 넓은 개념입니다. 그 현상의 근원적인 원인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연기법이고 그것을 아는 것이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출세간을 이루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이 수행법입니다. _()_



S12:23 연유(기반) 경(Upanisā-sutta)

upanisā : [f.] cause; means; likeness ① 縁, 縁由. ② 譬喻, 方便, 近習

nisā : [f.] night, 夜, loc. nise, nisi, nisati, nisāya, nisāyaṃ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타타삔디카 승원에 계셨다.


2. 그때 세존께서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다. 비구들은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3. “비구들이여, 알고 보는 자는 번뇌들이 소멸한다고 나는 말하고,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자는 번뇌들이 소멸하지 않는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는 자에게 번뇌들이 소멸하는가?


Jānato ahaṃ, bhikkhave, passato āsavānaṃ khayaṃ vadāmi, no ajānato no apassato.

Kiñca, bhikkhave, jānato kiṃ passato āsavānaṃ khayo hoti?


 ‘이것이 물질이다. 이것이 물질의 일어남(원인)이다. 이것이 물질의 사라짐(소멸)이다.

이것이 느낌이다. 이것이 느낌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느낌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인식이다. 이것이 인식(지각)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인식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형성[行]이다. 이것이 형성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형성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의식이다. 이것이 의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의식의 사라짐이다.’라고

이와 같이 알고 보는 자에게 번뇌가 소멸한다.”


Iti rūpaṃ iti rūpassa samudayo iti rūpassa atthaṅgamo,

iti vedanā … pe …

iti saññā …

iti saṅkhārā …

iti viññāṇaṃ iti viññāṇassa samudayo iti viññāṇassa atthaṅgamoti.

Evaṃ kho, bhikkhave, jānato evaṃ passato āsavānaṃ khayo hoti.


atthaṅgama : [attha+gamu+a][m.] setting down
attha : [m.] welfare; gain; wealth; need; want; use; meaning; destruction, 義, 利益, 道理, 意味, 必要, 裁判


4. “비구들이여, 번뇌가 소멸할 때 그 소멸에 대한 지혜에는 연유가 있으며 연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소멸의 지혜의 연유인가? 해탈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해탈도 연유가 있는 것이지 연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해탈의 연유인가? 갈애의 떠남(벗어남. 소멸)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갈애의 떠남에도 연유가 있는 것이지 연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갈애의 떠남의 연유인가? 염오(싫어하여 떠남)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염오도 연유가 있는 것이지 연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염오의 연유인가? 있는 그대로 알고 봄[如實知見]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있는 그대로 알고 봄도 연유가 있는 것이지 연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의 연유인가? 삼매(samādhi)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삼매도 연유가 있는 것이지 연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삼매의 연유인가? 행복(sukha)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행복도 연유가 있는 것이지 연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행복의 연유인가? 청정함(passaddhi)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청정함도 연유가 있는 것이지 연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청정함의 연유인가? 희열(piti)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희열도 연유가 있는 것이지 연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희열의 연유인가? 만족(pamojja.환희)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환희도 연유가 있는 것이지 연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환희의 연유인가? 믿음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믿음도 연유가 있는 것이지 연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믿음의 연유인가? 괴로움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괴로움도 연유가 있는 것이지 연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연유인가? 태어남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태어남도 연유가 있는 것이지 연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태어남의 연유인가? 존재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존재도 연유가 있는 것이지 연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존재의 연유인가? 취착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취착도 연유가 있는 것이지 연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취착의 연유인가? 갈애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갈애도 연유가 있는 것이지 연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갈애의 연유인가? 느낌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느낌도 연유가 있는 것이지 연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느낌의 연유인가? 감각접촉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감각접촉도 연유가 있는 것이지 연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감각접초의 연유인가? 여섯 감각장소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여섯 감각장소도 연유가 있는 것이지 연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여섯 감각장소의 연유인가? 정신∙물질(명색)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정신.물질도 연유가 있는 것이지 연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정신.물질의 연유인가? 의식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의식도 연유가 있는 것이지 연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의식의 연유인가? 형성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형성도 연유가 있는 것이지 연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형성의 연유인가? 무명이라고 말해야 한다.”


5.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무명을 연유로 형성이, 형성을 연유로 의식이, 의식을 연유로 정신∙물질이, 정신∙물질을 연유로 여섯 감각장소가, 여섯 감각장소를 연유로 감각접촉이, 감각접촉을 연유로 느낌이, 느낌을 연유로 갈애가, 갈애를 연유로 취착이, 취착을 연유로 존재가, 존재를 연유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연유로 괴로움이, 괴로움을 연유로 믿음이, 믿음을 연유로 환희가, 환희를 연유로 희열이, 희열을 연유로 청정함이, 청정함을 연유로 행복이, 행복을 연유로 삼매가, 삼매를 연유로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이,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을 연유로 염오가, 염오를 연유로 탐욕의 사람짐이, 탐욕의 사라짐을 연유로 해탈이, 해탈을 연유로 소멸의 지혜가 있다.”


6.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이러한다. 산꼭대기에 억수같이 비가 내리면 경사진 곳을 따라 빗물이 흘러내려서 산의 협곡과 계곡과 지류를 가득 채운다. 협곡과 계곡과 지류들을 가득 채우고는 다시 작은 연못을 가득 채운다. 작은 연못을 가득 채우고는 다시 큰 연못을 가득 채운다. 큰 연못을 가득 채우고는 다시 작은 강을 가득 채운다. 작은 강을 가득 채우고는 다시 큰 강을 가득 채운다. 큰 강을 가득 채우고는 다시 바다와 대해를 가득 채운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무명을 연유로 형성이, 형성을 연유로 의식이, 의식을 연유로 정신∙물질이, 정신∙물질을 연유로 여섯 감각장소가, 여섯 감각장소를 연유로 감각접촉이, 감각접촉을 연유로 느낌이, 느낌을 연유로 갈애가, 갈애를 연유로 취착이, 취착을 연유로 존재가, 존재를 연유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연유로 괴로움이, 괴로움을 연유로 믿음이, 믿음을 연유로 환희가, 환희를 연유로 희열이, 희열을 연유로 청정함이, 청정함을 연유로 행복이, 행복을 연유로 삼매가, 삼매를 연유로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이,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을 연유로 염오가, 염오를 연유로 탐욕의 사람짐이, 탐욕의 사라짐을 연유로 해탈이, 해탈을 연유로 소멸의 지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