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은 관육정품에서
보는 감각적인 것을
봄과 보는 자로 분리할 수 없음을 가르쳐 주심으로 이해했습니다.
우암은 봄(見)을 보는 행위와 보는 자로 구분한다는 것은
이미 '보는 내가 따로 존재한다.'라는 가정을 한 것으로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따로 보는 존재'란 눈으로 볼 수도 없으며,
그건 (중생의) '봄을 가능하게 하는 (숨겨진) 또 다른 봄(見可見)'을 상정하는 것이란 의미입니다.
우리는 그런 나(보는 자)를 상정하기 때문에 식(識), 촉(觸), 수(受), 애(愛)의 네 가지 법이 있어서, 욕취(欲取), 견취(見取), 계금취(戒禁取), 아어취(我語取)에 걸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존 번역을 우암은 도대체 받아들일 수가 없더군요.^^
MK. 3-2
是眼則不能 自見其己體 若不能自見 云何見餘物
김성철님 번역
"눈[能見]은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는 것이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
박인성님 번역
"이 눈은 자기를 볼 수 없네.
자기를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
우암은 중론의 觀六情品를 보면서 상당히 열 받았습니다.
기존 번역에서는 눈이 눈 자신을 바라다 볼 수 없으니
다른 것을 볼 수 조차 없다는 번역이었습니다.
우암의 졸견으로 보기에는 이건 말도 안되는 논리였습니다.
눈이 왜 눈을 못 봅니까?
거울로 봐도 되고 카메라로 봐도 되고....
만약 눈이 눈의 구조나 눈의 작용을 보지 못한다고 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만
이런 상황을 빗대어서 그래서 '다른 것을 볼 수 조차 없다.'는 결론은 영 엉성합니다.^^
나가르쥬나는 왜 이런 엉뚱한 주장을 할까요?
이런 이상한 주장에 기반해서 나가르쥬나는 논리를 더 비약시킵니다.
'자신도 못 보는데 다른 건 어떻게 보냐?'는 질문을 합니다.
우암이 기존 번역이 틀림 없다는 관점에서 이런 나가르쥬나의 논리를 그의 논리를 사용해서 논리로 깨 보겠습니다.
우린 눈으로 우주를 다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른 것을 본다 할 수 있습니까?
따라서 보지 못하는 용수보살은 이런 논리를 펼 수 없습니다.
혹은
우린 눈으로 원자 구조를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른 것을 본다 할 수 있습니까?
따라서 보지 못하는 용수보살은 이런 논리를 펼 수 없습니다.
우암이 관육정품을 읽으며 떠올랐던 불경은 금강경과 능엄경이었습니다.
금강경 제26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에서 감각기관으로는 부처님께서 알려주신 여래에 이를 수 없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만약 색신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능엄경에서 아난은 마음이 어디 있는 지를 찾으려 합니다. (칠번파심;七番破心)
그러나 찾을 수 없습니다.
혹시 나가르쥬나의 관육정품은 이 지점을 향하는 것은 아닐까요?
즉 '눈이 본다고 하지만 '여기 명백히 존재하는 나' 조차도 볼 수 없다면 과연 우리가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란 말이죠.
우암의 졸견으로는 '본다는 것의 대상(객체)은 무엇이며 보는 주체는 무엇인가?'
이 질문을 통해서 관육정품은 이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見若未見時 則不名爲見 而言見能見 是事則不然
見不能有見 非見亦不見 若已破於見 則爲破見者
볼 수 있지만 만약 아직 보지 못한 것이라면, 아직 이름지어지지 않은 것으로 본다는 것이니
이는 말로만 보는 작용으로 능히 본다는 것이니 사물은 그렇게 작용하지 않는다.
볼 수 있지만 본 것이 있다고 할 수 없다면, 본 것이 아니므로 역시 못 본 것이니
만약 이미 본다는 작용을 논파했다면 이는 보는 자도 타파한 것이다.
見은 보는 작용을 인정함이요, 보는 자를 인정함이다.
그런데 우리는 진실로 보아야 할 '대상'인 나를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봄을 통해서는 '나를 볼 수 없음'을 또한 '볼 수 있는 자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離見不離見 見者不可得 以無見者故 何有見可見
보는 작용을 떠나서건 떠나지 않건 보는 자는 얻을 수 없다.
보는 자가 없는데 어떻게 보는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봄이 있겠는가?
보고 보지 않음을 떠나서 따로이 보는 자를 얻을 수는 없다.
'보는 자가 없는데 어떻게 보는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봄'이란
만약 보는 자가 있다면 그 보는 자를 보는 또 다른 존재가 있어야 한다.
즉 보는 작용이 있고 이를 바라다 보는 자가 있고 이를 또 바라다 보는 자가 있게되고...
따라서 見可見이란 두 거울에 비친 끝없이 펼쳐지는 나를 표현함은 아닐런지...
見可見無故 識等四法無 四取等諸緣 云何當得有
보는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봄이 (내가) 없기 때문에 識등의 四法은 없다.
四取 등의 緣들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 나(보는 자)가 없으므로 식(識), 촉(觸), 수(受), 애(愛)의 네 가지 법이 없어서, 욕취(欲取), 견취(見取), 계금취(戒禁取), 아어취(我語取)가 없다는 것입니다.
第3 觀六情品(8偈) 六根에 대한 관찰
cakṣurādīndriyaparīkṣā nāma tṛtīyaṃ prakaraṇam 눈(眼)등의 지각 기관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3장(8게)
3-1) 眼耳及鼻舌 身意等六情 此眼等六情 行色等六塵
눈, 귀, 코, 혀, 몸, 생각 등은 육정인데 눈 등의 六情은 色 (聲, 香, 味, 觸, 法) 등의 六塵에서 작용한다.
darśanaṃ śravaṇaṃ ghrāṇaṃ rasanaṃ sparśanaṃ manaḥ
indriyāṇi ṣaḍeteṣāṃ draṣṭavyādīni gocaraḥ
보는 작용(시각), 듣는 작용(청각), 냄새 맡는 작용(후각), 맛보는 작용(미각), 촉감을 느끼는 작용(촉각), 생각을 떠올리는 작용(사고), 등은 여섯 가지 인식능력이다.
보여져야 할 대상 등(의 여섯 가지)은 이것들의 (=여섯 가지 인식능력의) 활동영역이다.
3-2) 是眼則不能 自見其己體 若不能自見 云何見餘物
이 눈이란 것은 스스로 그 자아의 몸을 보지 못한다.
만약 자신 조차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
svamātmānaṃ darśanaṃ hi tattameva na paśyati
na paśyati yadātmānaṃ kathaṃ drakṣyati tatparān
실로 보는 작용은 그 스스로에 있어서 그것이 그것을 보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이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
3-3) 火喩則不能 成於眼見法 去未去去時 已總答是事
불의 비유는 눈으로 본다는 법을 성립시키지 못한다.
이미 가버린 것, 아직 가지 않은 것,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에서 이미 이에 대해 충분히 답변했다.
na paryāpto ’gnidṛṣṭānto darśanasya prasiddhaye
sadarśanaḥ sa pratyukto gamyamānagatāgataiḥ
불의 비유는 보는 작용의 증명을 위해 적절치 않다.
그것(=불의 비유)은 앞에서 설명했던, ‘가는 중인 것, 간 것, 가지 않은 것’에 의해 보는 작용과 함께한다.
3-4) 見若未見時 則不名爲見 而言見能見 是事則不然
보기 전을 본다면 이름 붙여지지 않음을 봄이니,
보는 작용을 본다는 말이다.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nāpaśyamānaṃ bhavati yadā kiṃ cana darśanam
darśanaṃ paśyatītyevaṃ kathametattu yujyate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다면 보는 작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보는 작용(見)이 본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타당할 수 있겠는가?
3-5) 見不能有見 非見亦不見 若已破於見 則爲破見者
보는 작용이 있음을 볼 수도 없고 보는 작용이 아닌 것도 보는 것이 아니다.
이미 보는 작용을 논파했다면 결국 보는 자도 논파된다.
paśyati darśanaṃ naiva naiva paśyatyadarśanam
vyākhyāto darśanenaiva draṣṭā cāpyupagamyatām
보는 작용이 보는 것도 결코 아니고 보는 작용이 없는 것이 보는 것도 결코 아니다.
보는 작용에 대해 (이처럼) 설명한 것을 가지고 보는 놈도 이해해야 한다.
3-6) 離見不離見 見者不可得 以無見者故 何有見可見
보는 작용을 떠나서건 떠나지 않건 보는 자는 얻을 수 없다.
보는 자가 없는데 어떻게 보는 작용이나 보이는 것이 있겠느냐?
tiraskṛtya draṣṭā nāstyatiraskṛtya ca darśanam
draṣṭavyaṃ darśanaṃ caiva draṣṭaryasati te kutaḥ
보는 작용을 배제하건 배제하지 않건 보는 놈은 존재하지 않는다.
보는 놈이 없다면 보이는 것(=대상)이나 보는 작용, 그것들이 어떻게 있겠느냐?
3-7) 見可見無故 識等四法無 四取等諸緣 云何當得有
보는 작용과 보이는 대상에 (내가) 없기 때문에 識등의 四法은 없다.
四取 등의 緣들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draṣṭavyadarśanābhāvādvijṭānādicatuṣṭayam
nāstīty upādānādīni bhaviṣyanti punaḥ katham
보여지는 것과 보는 작용이 없기 때문에 識등의 네 가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取 따위의 것이 존재하겠는가?
3-8) 耳鼻舌身意 聲及聞者等 當知如是義 皆同於上說
귀, 코, 혀, 몸, 생각과 소리나 듣는 놈 등의 이치도
모두 앞에서 설한 것과 똑같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vyākhyātaṃ śravaṇaṃ ghrāṇaṃ rasanaṃ sparśanaṃ manaḥ
darśanenaiva jānīyācchrotṛśrotavyakādi ca
앞에서 설명했던 듣는 작용, 냄새 맡는 작용, 맛 보는 작용, 촉감을 느끼는 작용, 생각하는 작용 등은 보는 작용(에 대한 논파)에 의해 알 수 있으리라. 또 듣는 놈과 들리는 것(=소리) 따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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