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수보살의 중론

제8 관작작자품(觀作作者品)

우암(雨庵) 2017. 7. 2. 17:40

8 觀作作者品(12) 행위와 행위자에 대한 관찰

 

karamakārakaparīkā nāmāṣṭama prakaraam 행위와 행위자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8(13)


우암이 이해한 觀作作者品은 우리의 생이란 비결정적이지만, 비 우연적이란 점을 나가르쥬나가 강조했다고 이해했습니다.

만약 인과(因果)로만 본다면 이는 결정론적으로 본 것입니다.

즉 어떤 과거가 있어서 거기에 따라오는 '필연적'인 결과가 있다면

이는 결정론이란 말입니다.


결정론이란 시간의 흐름은 일방향이고 우린 그 흐름에서 과거를 바꿀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양자역학에서 나타난 결론들은 '현재 시점'의 선택이 과거를 결정합니다. (잘 이해가 안 되는 이상한 논리로 보이실 지 모르겠습니다. 양자 역학의 결과는 시간을 내서 다음에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결정론(인과론)에서는 업을 가진 자가 있으며

그 자가 그 업에 따라서 행위를 합니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죄도 없고 복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게 다 정해져 있으므로...


만약 모든게 우연이라면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원인과 결과의 흐름을 설명할 방법이 없겠죠.

우암이 이해한 바로는 거시적으로는 (오온의 세계에서는) 인과가 작동합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발생하는 원리의 측면(업의 연기)에서는 다양한 연기의 '에너지(파동)'가 겹쳐지고 얽혀집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그 중생의 업에서 벗어나는 방법입니다.


나가르쥬나는 이 품에서 마치 열반이 없다는 듯이 말을 합니다.

열반이 없음이 열반임을 역설한다고 우암은 이해했습니다.

열반은 열반이 아니고 그 이름이 열반이기 때문입니다.





8-1) 決定有作者 不作決定業 決定無作者 不作無定業

결정적으로 존재하는 행위자라면 결정적인 행위를 짓지 못한다.

결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행위자도 결정적이지 않은 행위를 짓지 못한다.


분별하여 정하여 진 것에(決定) 행위자가 있으면 (나라는 한 생각 일으켰다면)
결정된 업을 짓는 것은 아니다. (미래가 다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분별하여 정하여 진 것에(決定) 행위자가 없으면 (나라는 한 생각이 없다면)
정해진 업이 없는 것을 짓는 것이 아니다. (미래에 나와 무관한 업을 짓는 것이 아니다.)


決: 결정하다, 분별하다 定: 정하다, 정해지다


sadbhūta kāraka karma sadbhūta na karotyayam

kārako nāpyasadbhūta karmāsadbhūtamīhate

실재하는 행위자 그것은 실재하는 행위를 행하지 못한다.

실재하지 않는 행위자도 역시 실재하지 않는 행위를 시도하지 못한다.

 

8-2) 決定業無作 是業無作者 定作者無作 作者亦無業

결정적으로 존재하는 행위에는 작용도 없고 행위자도 없다.

결정적으로 존재하는 행위자에게는 작용도 없고 행위도 없다.


결정된 행위에서 지음이 없다는 것은

바로 행위에 짓는 자가 없음이다.

정해진 짓는 자에게 지음이 없으며

짓는 자에게 또한 행위가 없음이다.


만약 이미 그렇게 하기로 결정되어 있었다면, 거기에는 더 이상 지음이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행위를 짓는 자란 존재할 수 없다.

또한 이미 그렇게 하기로 결정되어 있는 자가 있다면 거기에는 지음도 있을 수 없으며

짓는 자에게는 행위도 또한 없다.


sadbhūtasya kriyā nāsti karma ca syādakartkam

sadbhūtasya kriyā nāsti kartā ca syādakarmaka

실재로 존재하는 것(행위)에 있어서 작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 그 행위는 행위자가 없는 존재이리라.

실재로 존재하는 것(행위자)에 있어서 작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 그 행위자는 행위 없는 존재이리라.

 

8-3) 若定有作者 亦定有作業 作者及作業 卽墮於無因

만일 행위자도 결정적으로 존재하고 행위도 결정적으로 존재한다면

행위자와 행위는 無因論 떨어진다.


만약 짓는 자가 있음이 정하여져 있고

또한 짓는 행위가 정하여져 있다면

짓는 자와 짓는 행위는

원인 없음에 떨어지게 된다.


墮 떨어질 타


만약 행위와 행위자가 모두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거기에는 원인이란 없다는 의미가 되어 버린다.


karoti yadyasadbhūto ’sadbhūta karma kāraka

ahetuka bhavetkarma kartā cāhetuko bhavet

만일 실재하지 않는 행위자가 실재하지 않는 행위를 한다면

행위는 無因 것이 되리라.또 행위자도 無因 것이 되리라.

 

8-4) 若墮於無因 則無因無果 無作無作者 無所用作法

만일 無因論 떨어진다면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으며

작용도 없고 행위자도 없고 행위도 없게 된다.


만약 원인이 없음에 떨어진다면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으므로

지음도 없고 짓는 자도 없음이니

짓는 법이란 것 조차 의미가 없게 된다.


hetāvasati kārya ca kāraa ca na vidyate

tadabhāve kriyā kartā karaa ca na vidyate

원인이 없다면 행위의 결과도 행위의 원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없다면 작용도 행위자도 수단도 존재하지 않는다.

 

8-5) 若無作等法 則無有罪福 罪福等無故 罪福報亦無

만일 작용등의 법이 없다면 죄나 복(등의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죄나 복(등의 법)이 없기에 죄나 복의 과보도 없다.


만약 짓는 등의 법이 없다면

이는 죄와 복이 없다는 것이며

죄와 복이 없는 고로

죄와 복의 판단 또한 없어진다.


報 갚을 보, 판가름하다


dharmādharmau na vidyete kriyādīnāmasabhave

dharme cāsatyadharme ca phala tajja na vidyate

작용 존재하지 않는다면 非法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법과 비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거기서 과보는 존재하지 않는다.

 

8-6) 若無罪福報 亦無有涅槃 諸可有所作 皆空無有果

만일 죄와 복의 과보가 없다면 열반도 역시 없다.

또 있을 수 있는 모든 작용도 모두 하여 그 결과가 없다.


만약 죄와 복의 판단이 없다면

이는 열반이 없다는 것이며

모든 짓는 곳이 있다고 한다면

모두 공하여져서 인과란 없어진다.


phale ’sati na mokāya na svargāyopapadyate

mārga sarvakriyāā ca nairarthakya prasajyate

과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해탈을 위한, 昇天 위한 존재하지 않는다.

또 일체의 작용들이 무의미하다는 오류에 빠진다.

 

8-7) 作者定不定 不能作二業 有無相違故 一處則無二

결정적으로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행위자는 두가지 행위를 할 수 없다.

서로 위배되므로 한 곳에 ( )두가지는 없다.


짓는 자가 정하여졌지만 정하여 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두 가지 행동을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있음과 없음이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한 곳이지 둘일 수는 없다.


違 어긋날 위  1. 어긋나다 2. 어기다(지키지 아니하고 거스르다)


kāraka sadasadbhūta sadasatkurute na tat

parasparaviruddha hi saccāsaccaikata kuta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행위자가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것을 행한다는 것, 그것은 옳지 않다.

서로 상반되는 <존재> <비존재>가 실로 어떻게 한 곳에서 (있을 수 있는 것)일까?

 

8-8) 有不能作無 無不能作有 若有作作者 其過如先說

지을 수 없고 무가 유를 지을 수 없다.

만일 행위와 행위자가 있다면 그 과실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있음에서 없음을 지을 수 없으며

없음에서 있음을 지을 수 없으니

만약  지음과 짓는 자가 있다면

그 잘못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둘 일 수 없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다.

만약 지음과 짓는 자가 있다면 없다는 말은 틀린 말이고

만약 지음과 짓는 자가 없다면 있다는 말은 틀린 말이 된다.


satā ca kriyate nāsannāsatā kriyate ca sat

kartrā sarve prasajyante doāstatra ta eva hi

행위자의 의해 지어지지 않고 또 행위자의 의해 지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모든 곳에서 틀림없이 그런 과실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8-9) 作者不作定 亦不作不定 及定不定業 其過如先說

행위자는 결정적이거나 결정적이지 않거나

결정적이면서 결정적이지 않은 행위를 짓지 못한다. 그 과실은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다.


짓는 자가 정해진 것을 짓지 않거나

또는 정해지지 않은 것을 짓지 않거나

정해지거나 정해지지 않은 행위를 한다는 것은

그 잘못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결정론도 우연론도 맞지 않다.


nāsadbhūta na sadbhūta sadasadbhūtameva vā

karoti kāraka karma pūrvoktaireva hetubhi

실재하는 행위자가 실재하지 않는 행위 또는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행위를 실로 행하지 못한다. 이는 실로 앞에서 말한 이유 때문이다.

 

nāsadbhūto ’pi sadbhūta sadasadbhūtameva vā

karoti kāraka karma pūrvoktaireva hetubhi

실재하지 않는 행위자도 실재하는 행위 또는 실재하며 실재하지 않는 행위를 행하지 못한다. 이는 앞에서 말한 이유 때문이다.

 

8-10) 作者定不定 亦定亦不定 不能作於業 其過如先說

행위자가 실재하건 실재하지 않건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건 행위를 행할 수 없다.

그 과오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짓는 자가 정해짐이 정해지지 않음이란

또한 정해짐이고 또한 정해지지 않음이니

행위를 짓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며

그 잘못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짓는 자란 행위를 분석하면서 나타나는 분석의 결과일 뿐이다. 


karoti sadasadbhūto na sannāsacca kāraka

karma tattu vijānīyātpūrvoktaireva hetubhi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행위자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행위를 행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은 앞에서 말했던 이유에 의해 이해하리라.

 

8-11) 因業有作者 因作者有業 成業義如是 更無有餘事

행위로 인하여 행위자가 존재하고 행위자로 인하여 행위가 존재한다.

행위가 이룩되는 이치는 이와 같아서 다시 어떤 다른 일은 없다.


행위로 인하여 짓는 자가 있게 되고

짓는 자로 인하여 행위가 있게 된다.

행위가 이루어지는 이치가 이와 같으며

이 외의 다른 일이란 없다.


행위와 짓는 자란 서로 의지하는 착각에 의해서 나타나는 현상에 불과하다.


pratītya kāraka karma ta pratītya ca kārakam

karma pravartate nānyatpaśyāma siddhikāraam

행위자는 행위에 하며 행위는 그 행위자에 하여 일어난다.

우리들은 그것 이외의 다른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원인의 성립을 보지 못한다.

 

8-12) 如破作作者 受受者亦爾 及一切諸法 亦應如是破

행위와 행위자를 논파하듯이 取者 마찬가지다.

또 일체의 존재도 역시 응당 이와 같이 논파해야 하리라.


지음과 짓는 자를 논파하였듯이

받음과 받는 자도 이와 같으며

일체의 모든 법도

역시 응당 이와 같이 논파하라.


爾 너 이 1. 너 2. 성(姓)의 하나 3. 어조사(語助辭) 4. 같이


이란 능동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란 수동적으로 당하는 것?


eva vidyādupādāna vyutsargāditi karmaa

kartuśca karmakartbhyā śeān bhāvān vibhāvayet

이와 마찬가지로 있어서도 행위와 행위자가 타파된다고 알지어다.

행위와 행위자에 의해서 나머지 존재들을 고찰하거라.


A10:205 비뚤어짐 경(Saṁsappanīya-sutta)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비뚤어짐에 대한 법문인가?

비구들이여, 중생들은

업이 바로 그들의 주인이고(Kammassakā),

업의 상속자이고(kammadāyādā),

업에서 태어났고(kammayonī),

업이 그들의 권속이고(kammabandhū),

업의 그들의 의지처이다(kammapaisaraā).


좋은 업이든 나쁜 업이든 어떤 업을 지으면 그들은 그 업의 상속자가 된다.


Kammassakā, bhikkhave, sattā kammadāyādā kammayonī kammabandhū kammapaisaraā, ya kamma karonti- kalyāa vā pāpaka vā- tassa dāyādā bhavanti.


kammassaka [kamma+saka] ()自己的

saka : [adj.] one's own. (m.) a relation. (nt.) one's own property, 自分, 自己

satta : 'living being'(=attā, puggala, jīva), 有情, 衆生, 중생

dāyāda : [m.] inheritance. (adj.) (in cpds.) inheriting, 続人, 繼承人

yoni : [f.] origin; realm of existence; the female organ; knowledge; species, , 子宮, ; 起源, 原因

bandhu : [m.] kinsman; relative; relation, 親族, 親戚, 親類, 縁者

paisaraa : [nt.] shelter; help; protection, 歸依所, 歸趣, 所依

karonta: [pr.p of karoti] doing; acting; making; building

kalyāa : [adj.] charming; morally good. (nt.), goodness; merit; virtue; welfare, 善的, 善良的

pāpaka: [adj.] wicked; sinful; (in cpds.): leading to, ,

tassa , 称代名词第三人称


S35:146 업 경 (Kamma-sutta, Kammanirodhasutta)


3.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오래된 업인가?


비구들이여, 눈은 오래된 업이라는 조건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고 의도의 토대가 되는 것이고 느낌의 토대가 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귀는 오래된 업이라는 조건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고 의도의 토대가 되는 것이고 느낌의 토대가 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코는 오래된 업이라는 조건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고 의도의 토대가 되는 것이고 느낌의 토대가 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혀는 오래된 업이라는 조건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고 의도의 토대가 되는 것이고 느낌의 토대가 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몸은 오래된 업이라는 조건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고 의도의 토대가 되는 것이고 느낌의 토대가 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마노는 오래된 업이라는 조건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고 의도의 토대가 되는 것이고 느낌의 토대가 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4.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새로운 업인가?

비구들이여, 지금 몸과 말과 마노로 짓는 업을 새로운 업이라 한다.”


5.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업의 소멸(kammanirodho)인가?

비구들이여, (kāya)의 업과 말(vacī)의 업과 마노(mano)의 업이 소멸하여

해탈을 체득하는 것을 일러 업의 소멸이라 한다.”


6.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업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인가?

비구들이여, 바로 이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팔정도]이니 그것은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삼매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업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이라 한다.”


7. “비구들이여, 이처럼 나는 그대들에게 새로운 업과 오래된 업 그리고 업의 소멸과 업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에 대해서 설했다. 항상 제자들의 이익을 기원하며 제자들을 연민하는 스승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이제 나는 연민으로 그대들에게 하였다. 비구들이여, 여기 나무 밑이 있다. 여기 빈집들이 있다. 명상을 하라. 비구들이여, 방일하지 마라.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 이것이 그대들에게 주는 나의 간곡한 당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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