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삼명으로 번역해 본 의상대사의 법성게

우암(雨庵) 2015. 7. 15. 21:41

초기불교 공부를 하다가

막연히 화엄경이 궁금해져서 법성게를 보게되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번역과 제게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의미가 달랐습니다.

그래서 '용감하게' 제 방식대로 한번 번역한 것을 보여드립니다.

 

사실 저는 화엄경을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화엄경도 초기경전과 같은 말씀을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제 초기경전의 이해로 법성게를 해석해 보았습니다.

저는 법성게의 내용이 깨달음 자리 및 그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언어로 옮기셨다고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추가로 부연 설명을 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에서 깨달음에 처음 도달하신 분이 석가모니 부처님이십니다.

세존께서는 각고의 수행 끝에 선정을 통해서 삼명을 얻으십니다.

삼명이란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입니다.

먼저 나의 수없는 전생을 모두 아시게 되는 숙명통을 먼저 얻으시고

그 다음에 이렇게 수 많은 (최소한 10만생) 케이스 스터디를 통해서

다른 사람과 나의 주변의 관계 뿐만 아니라

남들의 운명까지도 알게 되시는 천안통을 얻으시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의 모습을 석연히 아시게 되자

이 중생세간에 대한 이해가 끝나시고 (무명 타파)

이에 따라서 탐하거나 진하는 것 번뇌가 사라지십니다(누진통).

다른 말로 하자면 번뇌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는 방법은 삼명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모습이 부처님께서 깨달음에 도달하신 과정이라면

의상대사건 법장스님이건 만약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에 도달했다면

이러한 삼명의 지혜를 통해서일 것입니다.

 

따라서 법성게가 깨달음의 노래라면

당연히 이러한 삼명의 과정이 들어갈 수 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삼명의 관점에서 법성게를 해석을 해보니

제게는 모두 뜻이 통하더군요.

그래서 기존과는 다른 이해이지만 한번 올려봅니다.

 

 

 

 

법성게 法性偈

 

(깨달음의 경지를 알려 주심)

法性圓融無二相   법의 성품 둥글고 넓어서 두 모양이 없고

諸法不動本來寂   모든 법은 움직인 바 없이 본래 고요하다.

無名無相絶一切   이름 없고 모습 없어 모든 것이 멈추니

證智所知非餘境   보여진 지혜로서 알 뿐 다른 경계 아니라네.

 

(깨달음의 방법을 알려 주심-證智所의 설명)

眞性甚深極微妙   참된 성품 심히 깊어 지극히 미묘하니

不守自性隨緣成   자아라는 것에 머무르지 않으니 인연 따라 이루어지네.

 

(깨달음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연기를 알게되는 과정을 알려주심)

一中一切多中一   한 생 안에 모든 생이 있고 많은 생이 하나로 나타나니 (나에겐 수많은 전생이 있고)

一卽一切多卽一   한 생이 곧 모든 생이요 여러 생이 곧 한 생이라.

  (나라는 것은 모든 전생의 결과요 여러 전생의 결과로 내가 있다네)

 

一微塵中含十方   한 티끌(중생) 안에 모든 세상(전생의 세계)이 들어있고

一切塵中亦如是   모든 중생들 역시 그러하다.

 

無量遠劫卽一念   하나가 된 마음으로 (심일경성에서 숙명통으로) 내 과거(무량겁)를 보니

一念卽是無量劫   한 마음을 일으켜 윤회의 세계(무량겁)가 생겼구나.

 

九世十世互相卽   시간을 뛰어 넘어 세상의 이치를 살피니 (숙명통도 보고 천안통도 보니)

仍不雜亂隔別成   (현생과 전생은) 나누어져 별도로 이루어지니 섞여서 혼란치 않다.  (인과란 명백하다.)

 

(깨달음의 자리를 다시 한번 알려주심.)

初發心時便正覺   생각이 처음 일어나는 그곳이 곧 바른 깨침 자리이고

生死涅槃常共和   생사와 열반이 항상 같이 조화를 이룬다. (한 생각이면 생사요 조용하면 열반이라)

 

理事冥然無分別   이치와 세상일이 그윽해져 분별이 없어지면

十佛普賢大人境   열 부처님 보현보살 큰 사람의 경계라네.

 

(깨달음의 공덕을 알려주심)

能仁海印三昧中   부처님께서 해인의 삼매(삼명의 명지) 속에서

繁出如意不思議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뜻을 나타내시니

雨寶益生滿虛空   보배 비 내려 허공을 가득 채운 중생에게 이익이 되네.

衆生隨器得利益   중생은 그릇에 따라 이익을 얻고

是故行者還本際   그 까닭에 사람들은 본래 자리 돌아갈 수 있지만

叵息妄想必不得   망령된 생각을 쉬지 않는다면 얻을 것이 없다네.

 

(가르침의 공덕)

無緣善巧捉如意   (업연에 끌려가는 것이 아닌) 연을 벗어난 선한 일을 마음대로 펼치니

歸家隨分得資糧   집으로 돌아갈 때(열반) 필요한 여비와 식량을 얻음이라.

 

以陀羅尼無盡寶   이 다라니는 끝이 없는 보배로서

莊嚴法界實寶殿   법계를 장엄하여 보물스러운 궁전을 이루게 하고

窮坐實際中道床   마침내 참선하여 끝이 드러나 중도 자리 이루니

舊來不動名爲佛   예부터 있었으나 움직임이 없어 이를 불러 깨달음(부처)이라 하네.

 

해설

 

眞性甚深極微妙   참된 성품 심히 깊어 지극히 미묘하니

不守自性隨緣成   자아라는 것에 머무르지 않으니 인연 따라 이루어지네.

앞의 문장에서 진성과 뒷 문장의 자성이 대비된다고 보았습니다.

진성이란 깨달음의 자리이구요, 여래이구요.

그러나 자성이란 자아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우리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관찰된 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내 것'이라는 생각에 머무르지 않기에 (식이 머무르지 않기에, 움켜쥐지 않기에)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다라고 보았습니다.

인연 따라 이루어 진다는 것은 '나라는 것을' 내려 놓기만 하면 된다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九世十世互相卽   시간을 뛰어 넘어 세상의 이치를 살피니 (숙명통도 보고 천안통도 보니)

구세란 과거의 과거현재미래, 현재의 과거현재미래, 미래의 과거현재미래 이고

십세란 구세에 내(관찰자)가 합쳐져 있는 것

그러므로 구세란 객관 세계이고 십세란 거기에 내(주관)가 참여한 것

주관과 객관이 서로 잘 조화로우니라는 뜻으로 보았다.

그것을 흐름을 잘 관찰하여 보니 즉 '연기를 보니'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그것을 보게 되는 '숙명통도 보고 천안통도 보니'로 부연 설명을 하였다.

 

仍不雜亂隔別成  지금의 내 아내가 전생의 부모 중에 한 사람일 수도 있고 등등 우리의 윤리적인 관념으로 볼 때는 납득이 되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생과 현생은 섞이지 않고 별도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섞여서 혼란하지 않다는 말씀이신 것으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