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이해가 어려운 S48:42 운나바 바라문 경

우암(雨庵) 2015. 7. 15. 21:05

많은 분들이 중요한 경이라고 하는

S48:42 운나바 바라문 경

에 대해서 질문을 해 볼까 합니다.

 

이 경은 sati를 한글로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설명할 때 많이 등장하더군요.

 

그런데 이 경은 읽으면 읽을 수록 잘 모르겠더군요.

이 경에서 관심을 끄는 대목은

 

오근(안이비설신, pañcanna indriyāna)은 마노(mano, 意)를 의지하고

마노는 마음챙김(sati, 念)를 의지하고

마음챙김은 해탈(vimutti)을 의지하고

해탈은 열반(nibbāna)을 의지한다.

 

입니다.

 

대체 이 말씀은 무엇을 뜻할까요?

 

먼저 의지한다(paisaraa)는 말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전적인 의미는 아래와 같습니다.

paisaraa : [nt.] shelter; help; protection, 피난처, 도움, 보호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의지하다'로 번역된 부분의 뜻은

'무엇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가?' 혹은

'무엇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가?'라고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한편 saraa는 세존께서 법에 의지하고 나에 의지하라고 하실 때 그 의지처입니다.

세존께서 알려주신 방법은 사념처입니다.

즉 사념처의 도움(보호)를 받으라는 말씀이시지요.

이렇게 보면 위에 제가 풀어 본 paisaraa 의미가 와 닿으실 겁니다.

 

그런데 각묵스님처럼 그냥 한글로 '오근은 마노를 의지한다.'라고 번역을 하면

그 의미가 마치 '오근은 마노의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가 있게 됩니다.

즉 마노가 오근을 경험한다는 것이지요.

저는 처음에 그렇게 이해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을 받아들이자 념(sati)이 해탈(vimutti)에 의지한다는 말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하고 생각했었습니다.

해탈이 념을 경험한다???

마음챙김은 해탈에 의지한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마음챙김이 해탈의 기반 위에 서 있다???

해탈은 열반의 기반 위에 서 있다???

 

결국 이 내용들을 종합하면 안이비설신이란 열반의 기반 위에 서 있다???

그렇다면 열반의 기반 위에 서 있지 않은 것도 있는가?

 

대체 무슨 말일까? 이게 혹시 평상심이 깨달음이란 말일까? 불각이 본각이란 말일까?

그렇게 볼 수도... 그렇지만 제겐 좀 이상한 내용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런 번역이 나타나게 되는 이유는

경전 상에 나타나는 운나바 바라문의 첫 질문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저는 그 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Imesa nu kho, bho gotama, pañcanna indriyāna nānāvisayāna nānāgocarāna na aññamaññassa gocaravisaya paccanubhontāna ki paisaraa, ko ca nesa gocaravisaya paccanubhotī.

 

각묵 스님의 번역은 아래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들 다섯 가지 감각기능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무엇이 그들의 대상과 영역을 경험합니까?

 

nānā : [ind.] different; differently

visaya: [m.] locality; region; sphere; object; scope; sensual pleasure; footing,

gocara: [m.] pasture; fodder; food (in common); sense object; suitable place, 牧場, 餌所, . ② 行境, , 範圍, 親近

aññamañña, (adj.), mutual, 相互

paccanubhoti : [pati + anu + bhū + a] undergoes; experiences

anubhoti : [anu + bhū + a] 1. undergoes; 2. partakes in, 3. eats; 4. experiences

paisaraa : [nt.] shelter; help; protection

 

위 문장에서 '무엇이 그들의 대상과 영역을 경험합니까?'라는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운나바 바라문은 마치 안이비설신을 경험하는 주체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 연장선에서 마음챙김, 해탈, 열반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니

그런 해석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부분을 좀 다르게 해석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paccanubhoti란 단어를 단순히 경험하다가 아니라 anubhoti(경험하다)하는 이유(pacca)로 보고자 했습니다. 경험하다란 단어인 anubhoti도 경향성(anu) 즉 과거의 습에 의해 경험한다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건 순전히 제 상상입니다. 저는 팔리어의 문외한 입니다.^^ 사전을 찾아가며 가르침의 뜻을 찾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해본 번역은

 

안이비설신은 무엇의 보호를 받아야 합니까? 무엇이 그 대상과 영역을 경험하게하는 이유입니까?

 

입니다. 이렇게 번역을 하고 나니 그 뒤 문장들이 비교적 쉽게 이해가 가능하더군요.

 

이 질문에 대한 세존의 답은

의근(意根)인 마노(주의를 기울이는 것)의 도움과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바른 주의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근을 수호하라는 말씀 같습니다.

운나바 바라문은 이 대답에 대해서 다시 질문을 합니다.

그렇다면 마노는 무엇의 도움과 보호를 받아야 하느냐고.

그러자 마음챙김의 도움과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아마도 바라문의 이 질문은 

마노는 선하게(yoniso) 혹은 불선하게(ayoniso) 작용할 수 있는데

'어떻게 바른 주의를 줄 수 있나요?'하는 질문인 것 같다.

세존의 대답은 감각된 현상에 휩쓸리지 말고 마음을 챙기라는 것이다.

그러자 '그렇다면 마음 챙김은 무엇에 도움과 보호를 받아야 하나요?'하고 다시 질문을 한다.

이에 대한 세존의 답변은 해탈에 도움과 보호를 받으라는 것이다.

해탈이란 풀려남이다. 즉 욕망에서 풀려나는 방향으로 sati를 하라는 것이다.

sati는 여러가지가 가능하고 잘못된 sati도 있다고 알려주신다. (S45 도 상윳다를 참고 하시길)

따라서 sati는 욕망에서 풀려나는 것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탈은 무엇의 도움과 보호를 받아야 하나요?' 하고 다시 질문을 한다.

세존께서는 열반(nibbāna)이라고 알려주신다.

열반이란 불이 꺼진 상태이다. 욕망의 불이 완전히 꺼져야 해탈이 된다고 알려주신 것이다.

 

그런데 운나바 바라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열반은 무엇에 의지하는가요?'라고 질문을 하자

세존께서는

열반이 최종 단계이며 그 한계를 몰라서 잘못된 질문을 하였다고 알려주신다.

즉 욕망의 불이 꺼진 것이 최종 경지라는 말씀이시다.

 

이렇게 해석을 해 보니 이 경의 가르침은 당연한 말씀이 된다.

 

 

한번 여러분들께서도 의견을 주셔 보시기 바랍니다.

 

S48:42 운나바 바라문 경 (Uṇṇābhabrāhmaa-sutta)

 

1.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한때에 세존께서는 사밧띠의 젯타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카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Sāvatthinidāna.

 

2. 그때 운나바 바라문이 세존께 찾아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하고서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운나바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Atha kho uṇṇābho brāhmao yena bhagavā tenupasakami; upasakamitvā bhagavatā saddhi sammodi. Sammodanīya katha sāraīya vītisāretvā ekamanta nisīdi. Ekamanta nisinno kho uṇṇābho brāhmao bhagavanta etadavoca:

 

3. “고따마 존자시여, 다섯 가지 감각기능은 각각 다른 대상과 각각 다른 영역을 가져서 서로 다른 대상과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다섯입니까?

눈의 감각기능, 귀의 감각기능, 코의 감각기능, 혀의 감각기능, 몸의 감각기능입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이처럼 다섯 가지 감각기능은 각각 다른 대상과 각각 다른 영역을 가져서 서로 다른 대상과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들 다섯 가지 감각기능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무엇이 그들의 대상과 영역을 경험합니까?”

Pañcimāni, bho gotama, indriyāni nānāvisayāni nānāgocarāni, na aññamaññassa gocaravisaya paccanubhonti. Katamāni pañca? Cakkhundriya, sotindriya, ghānindriya, jivhindriya, kāyindriya. Imesa nu kho, bho gotama, pañcanna indriyāna nānāvisayāna nānāgocarāna na aññamaññassa gocaravisaya paccanubhontāna ki paisaraa, ko ca nesa gocaravisaya paccanubhotīti?

 

4. “바라문이여, 다섯 가지 감각기능은 각각 다른 대상과 각각 다른 영역을 가져서 서로 다른 대상과 영역을 경험하지 않는다. 무엇이 다섯인가?

눈의 감각기능, 귀의 감각기능, 코의 감각기능, 혀의 감각기능, 몸의 감각기능이다.

바라문이여, 이처럼 다섯 가지 감각기능은 각각 다른 대상과 각각 다른 영역을 가져서 서로 다른 대상과 영역을 경험하지 않는다. 이들 다섯 가지 감각기능은 마노[]를 의지한다. 마노[]가 그들의 대상과 영역을 경험한다.”

 Pañcimāni, brāhmaa, indriyāni nānāvisayāni nānāgocarāni na aññamaññassa gocaravisaya paccanubhonti. Katamāni pañca? Cakkhundriya, sotindriya, ghānindriya, jivhindriya, kāyindriya. Imesa kho, brāhmaa, pañcanna indriyāna nānāvisayāna nānāgocarāna na aññamaññassa gocaravisaya paccanubhontāna mano paisaraa, manova nesa gocaravisaya paccanubhotīti.

 

5.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마노는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마노[]는 마음 챙김을 의지한다.”

Manassa pana, bho gotama, ki paisaraan”ti? “Manassa kho, brāhmaa, sati paisaraan”ti.

 

6.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마음 챙김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마음 챙김은 해탈을 의지한다.”

“Satiyā pana, bho gotama, ki paisaraan”ti? “Satiyā kho, brāhmaa, vimutti paisaraan”ti.

 

7.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해탈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해탈은 열반을 의지한다.”

“Vimuttiyā pana, bho gotama, ki paisaraan”ti? “Vimuttiyā kho, brāhmaa, nibbāna paisaraan”ti.

 

8.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열반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그대는 질문의 범위를 넘어서버렸다. 그대는 질문의 한계를 잡지 못하였구나. 바라문이여, 청정범행을 닦는 것은 열반으로 귀결되고 열반으로 완성되고 열반으로 완결되기 때문이다.”

“Nibbānassa pana, bho gotama, ki paisaraan”ti? “Accayāsi, brāhmaa, pañha, nāsakkhi pañhassa pariyanta gahetu. Nibbānogadhañhi, brāhmaa, brahmacariya vussati nibbānaparāyaa nibbānapariyosānan”ti.

 

9. 그때 운나바 바라문은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드린 뒤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절을 올리고 오른쪽으로 돌아 경의를 표한 뒤에 물러갔다.

Atha kho uṇṇābho brāhmao bhagavato bhāsita abhinanditvā anumoditvā uṭṭhāyāsanā bhagavanta abhivādetvā padakkhia katvā pakkāmi.

 

10. 그때 세존께서는 운나바 바라문이 물러간 지 오래지 않아서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누각이나 중각강당에 북쪽이나 남쪽이나 동쪽으로 창이 나 있다고 하자. 그러면 태양이 떠오를 때 창을 통해 빛이 들어와 어디에 멈추겠는가?”

“서쪽 벽입니다, 세존이시여.”

Atha kho bhagavā acirapakkante uṇṇābhe brāhmae bhikkhū āmantesi: “seyyathāpi, bhikkhave, kūāgāre vā kūāgārasālāya vā pācīnavātapānā sūriye uggacchante vātapānena rasmi pavisitvā kvāssa patiṭṭhitāti? “Pacchimāya, bhante, bhittiyan”ti.

 

11.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운나바 바라문은 여래에 믿음을 가져 흔들리지 않고 뿌리내려 확고하고 굳세다. 어떤 사문도 바라문도 신도 마라도 범천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것을 빼앗아갈 수 없다. 비구들이여, 만일 운나바 바라문이 지금 임종을 한다면 그는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오도록 그를 묶고 있는 그런 족쇄가 운나바 바라문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Evameva kho, bhikkhave, uṇṇābhassa brāhmaassa tathāgate saddhā niviṭṭhā mūlajātā patiṭṭhitā dahā asahāriyā samaena vā brāhma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ci vā lokasmi. Imamhi ce, bhikkhave, samaye uṇṇābho brāhmao kāla kareyya, natthi ta sayojana yena sayojanena sayutto uṇṇābho brāhmao puna ima loka āgaccheyyāti.

 

한글 경전은 붓다의 옛길(http://blog.daum.net/_blog/BlogTypeMain.do?blogid=06jgp&btype=0&navi=0)에서 가져왔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