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해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치판단(생각)에서 벗어나라! 그래야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이것이 제가 이해한 사성제입니다.
부처님께서 고가 무엇인지를 살표보시니 '나'라는 오온을 세우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오온이 내 몸과 경험이 나인 줄 알고 살면서
갈애를 일으키니 괴로움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 몸에 좋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다가 보니
내게 불리해 보일 때는 화도 내게 되고
이 사랑스런 내 '존재'인 몸과 내 자아가(오온이) 잘 되는 방향이라면
무조건 그 방향으로 '헐떡거리며' 갈애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그 나라는 것이 진짜 존재하는 줄 알고 갈애를 일으키고
그거를 성취하고 혹은 실패하면서 즐거워도 하고 슬퍼도 하면서
또한 다른 사람과 비교도 하면서 자람스럽기도 하고 괴롭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갈애는 언제나 괴로움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갈애는 '나'가 무엇인가 대상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부 일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고 이성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 대상들은 끊임없이 변화해서
결론적으로는 내게 괴로움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은 무상하기 때문에 대상을 영원히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대상이 변화하거나 '내가' 종국적으로는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변화하지 않음이 없음을 확연히 아시고 갈애를 내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야지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이 내 자아' 하나 잘되게 하려다가 괴로움이란 덫에 걸려있는 실정입니다.
더 나아가 부처님께서 세상의 이치를 보시니 연기법(인과법)으로 세상이 돌아가는데
이런 갈애는 결국 괴로울 수 밖에 없는 우리 존재를 유지시키는 연료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세상을 살아가며 연기법에 맞게 우리가 수행해 볼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알려 주신 겁니다.
너무 서론이 길었습니다.
저는 '대상은 밖에 없는가?'라는 글에서
대상은 실재하지 않는게 아니라고 거듭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윤회에 들어있는 한, 그 세계는 '객관'세계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불교에서는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세상이 사실은 꿈과 같은 것이며
시간도 공간도 없으며 대상도 없다는 말들을 합니다.
저는 자연과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또한 윤회를 믿는 사람으로서
이런 생각은 비 불교적이고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잘못된 견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는 왜 대상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반발을 할까요?
제 좁은 견해로는 이런 생각들이 다 공병(空病)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무시하고 논리에 사로잡힌 모습으로 비추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시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해한 대승불교로 제가 왜 이런 논지를 펴는지 말씀드리죠.
먼저 반야심경입니다.
반야심경이란 관세음보살께서 반야바라밀을 수행하실 때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보시고
고를 벗어난 경지를 설해주신 경입니다.
따라서 그 경지란 제법의 실상이라 할 수 있겠지요.
색과 공은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다.
색은 곧 공이고 공은 곧 색이다. ....
먼저 시점이 중요합니다. 반야심경의 내용은 깨달음에 드신 분의 시점입니다.
그 내용의 첫 구절은 색은 곧 공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 이후에 곧바로 공은 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질은 공이야!'라고 하시고는 그 말 바로 뒤에는 '공이 곧 물질이야!'라면서 거꾸로 뒤집어서 말씀을 하셨을까요?
제가 이해하기로는 만약 부처님께서 '물질이란 공이야'라고 하시고,
그리고 더 나아가 '오온이 다 공이야' 해 버리시면
이를 잘못 이해한 중생들이 허무주의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중생의 시점에서는 만약 세상의 모습이 환과 같은 것이라면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고 ... 12연기도 없고.. 사성제도 없고... 얻은 바도 없다.'
라는 표현에 그대로 걸려서 단멸론이나 허무주의에 빠져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의 시점은 깨달으신 분의 입장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깨달은 그 분께 이렇게 보이는 것이지 중생에게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착각하지 말라고
공이 곧 색이라고 다시 말씀을 해 주시는 겁니다.
만약 반야심경의 말씀을 중생이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 봅시다.
우리가 보는 세상이란 다 없다는 것입니다.
사성제도 없고 연기법도 없고 육근도 육경도 육식도 없습니다. 보는자와 보는 대상이 없습니다.
이걸 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대체 왜 수행을 해야하죠?
어차피 수행하는 것도 다 공한 것인데요???
이런 잘못된 해석은 깨달음의 경지에 대한 문자적인 이해, 사변적인 이해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걸 가츠켜 전도몽상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손가락 만을 보는 것입니다. 달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속제로 진제를 이해한다고 알음알이를 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경에서도 꿈 같이 환 같이 물방울 같이 그림자 같이 보라 하신 겁니다.
부처님께서 "중생'에게 인생을 꿈이라고 말씀하신게 아니라 그와 같이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애와 집착에서 벗어나 괴로움을 떠나고 윤회를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의 판단입니다. 뗏목입니다. 방편입니다. 마치 부정관 같은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에 제자를 가르치실 때
비구들이 감각적인 즐거움에 대한 갈애를 벗어나기가 어려워하자 부정관을 알려주십니다.
즉 여자란 예쁘고 즐거운 대상이 아니라 핏덩이에 똥을 담은 가죽푸대이며
고름덩어리에 썩으면 냄새나는 혐오의 존재로 보라고 알려 주셨죠.
그리고 세존께서는 한동안 홀로 수행을 하시고 돌아오니 비구의 숫자가 줄어있었습니다.
세존께서 그 이유를 물어보시니
부정관을 수행하던 제자들이 자신의 몸을 혐오하게 되어서 자살을 하신 겁니다.
여자란 혹은 이성이란 아름답기만 한 존재입니까? 혐오스럽기만 한 존재입니까?
상대방의 생김새에 따라 다르다구요?^^
세간의 미인이라 하더라도 아름답다해도 한방망이요 혐오스럽다 해도 한방망이 입니다.
저는 동일한 논리가 대상문제에도 적용된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중생에게 세상을 공하게 보라고 하셨지 '세상은 꿈이야!'라고 말씀하신게 아닙니다.
이 말의 의미는 대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이시지 윤회의 세상을 부정하신게 아닙니다.
잘못 알고 있는 세상에 대한 견해에 대해
(대상의 세계는 실재고 모두 현실이어서 미추 장단 등이 실재 한다는 견해)
동일 대상에 대해서 전혀 다른 가치판단의 견해를 제시해서 (유위)
그 갈애와 집착을 일으키는 중생의 판단 기준을 무력화시키려 함입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이런 언어로 구성된 가르침이
오독으로 인해 잘못된 방향으로 빠지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래서 뗏목의 비유를 알려주시는 겁니다.
대상이 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대상이 꿈같다.'는 뗏목으로 강 건너 저 언덕으로 가야 하는데
배는 타지 않고 뗏목을 짊어지고 가는 형국입니다.
제 이야기대로라면 세상 일을 꿈 같이 보는 것을 수행 삼아서 집착하지 않고 살면 되는데
대체 저는 왜 자꾸 문제를 제기할까요?
제 눈에 비추어진 모습은
'세상은 꿈이야!'라고 주장하는 것이 '법상'에 집착하는 모습으로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집착의 대상이 물질에서 '법'으로 바뀌었을 뿐
그 집착하는 구조는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연기의 세계 안에 그대로 머물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알려주신 열반으로 가는 가르침과는 한참 먼 이야기입니다.
깨달은 분의 관점에서는 '법'도 꿈과 같은 이야기일 따름입니다.
'대상은 있다.'가 하나의 단견이라면
그와 마찬가지로
'대상은 없다.'도 하나의 단견입니다.
그렇다면 대상은 있기도 하면서 없기도 한 것일까요?
아니면 대상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일까요?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是便正覺) 이란 법성게의 구절이 있죠.
번역이 다양하더군요.
1. 처음 발심한 그 때가 바로 정각을 이룬 때
2. 처음 올바른 마음을 일으키면 곧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
제 견해를 말씀드려보면
생각이 처음 일어나는 그곳이 곧 바른 깨침 자리라는 겁니다.
그래서 생각이 일어나는 곳에서(사념처) 마음 챙김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견해에서 본다면 위의 두 번역은 상당히 문제가 있는 해석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신수대사와 육조 혜능의 게송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시보리수(身是菩提樹) 몸은 보리의 나무요
심여명경대(心如明鏡臺) 마음은 밝은 거울의 대와 같나니
시시근불식(時時勤拂拭)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물사야진애(勿使惹塵埃) 티끌과 먼지 않게끔 말지니라.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명경역비대(明鏡亦非臺) 밝은 거울 또한 틀이 아니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묻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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