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덕산스님 일화와 M38 갈애 부숨에 대한 큰 경 의 공통점

우암(雨庵) 2015. 8. 18. 19:11

자귀의를 설명해 보면서

덕산 스님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묘하게도 갈애 부숨에 대한 큰 경과 덕산스님 일화가 일치하는 점이 보이는 군요.^^

깨달음의 여정이 같아서 그런 것인지

혹은 '중국에서 이야기를 그렇게 만든 것인가?'하는 느낌 마저 들더군요.

 

M38. 갈애 부숨에 대한 큰 경에서는

세존께서 제자들에게 다시한번 조건지워진 것에 대해 알려주십니다.

§20~54 의식이 발생하는 과정적 조건 – 12 연기를 설해 주십니다.

생겨나는 것을 기준으로

또한 소멸하는 것을 기준으로 역관과 순관으로 번갈아가면서 연기법을 확인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55 십이연기를 알고 보면 과거, 미래, 현재에 걸친 존재에 대한 궁금증, 의문은 타당하지 않다.

§56. 스스로 알고 스스로 보고 스스로 깨달은 것만을 말하는 것이 옳다.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이 순서는 덕산 스님 일화와 우연 같이 일치합니다.

 

덕산 스님께서 용담 스님을 뵈러 가실 때 2가지 일화가 있습니다.

떡 장수 할머니와의 일화 및 용담스님과의 일화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떡장수 할머니와의 일화는 앞서 살펴 본 갈애 부숨에 대한 큰 경에서 나타난

'십이연기를 알고 보면 과거, 미래, 현재에 걸친 존재에 대한 궁금증, 의문은 타당하지 않다.'는 내용이고

용담 스님과의 일화는 

'스스로 알고 스스로 보고 스스로 깨달은 것만을 말하는 것이 옳다.'는 내용과 일치합니다.

 

먼저 떡장수 할머니와의 일화입니다.

덕산스님은 금강경에 주석을 달 정도로 금강경에 통달했으며 주금강(周金剛)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덕산스님은 남방에서는 불입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 등으로 부처가 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들에게 금강경을 전법하고자, 바랑에 금강경소를 챙겨 넣고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다가 점심때가 되자 떡장수 노파에게 떡을 점심(點心 마음에 점을 찍음)으로사먹으려는데 노파가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노파: “스님, 바랑 속에 웬 물건이 많이 들어 있어 무거워 보입니다. 대체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덕산: “금강경에 내가 직접 주석을 단 금강경소입니다.”
노파: “아, 그래요? 금강경에 대해 그렇게 잘안다면, 내가 하나 묻겠습니다.  만약에 내 질문에 대답을 하면 떡을 공짜로 드리고 만약에 대답을 하지 못하면 떡을 팔지 않겠습니다.”
덕산: “예, 좋습니다.  무엇이든 물어 보십시오.”
노파: “금강경에 과거심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스님께서는 지금 어느 마음에 점심(點心)을 할 것입니까?”
덕산: ......

[출처] 덕산스님과 금강경이야기 (화엄선원) |작성자 지행에서 모셔온 글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용담 스님의 어머니인 떡장수 노파는 덕산 스님에게 묻습니다.

금강경에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이라 했는데

점심(點心)이라면 과연 어떤 것을 기준으로 삼아서 살아갈 것인가?

그 무엇도 얻을 수 없다 했거늘 어디에 점을 찍을 수 있다는 말인가요?

하고 큰 스님의 어머니 다운 질문을 한 것이다.

 

이 질문을 평이한 말로 푼다면

'십이연기를 알고 보면 과거, 미래, 현재에 걸친 존재에 대한 궁금증, 의문은 타당하지 않다.'가 아닐까요? 그래서 만약 연기를 알았다면 어디에 기준을 삼아 살아갈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 내용을 무상함으로 풀어볼 수도 있지만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무상하다면 삶의 기준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으로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질문에 덕산 스님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덕산스님은 정신을 가다듬고 노파에게 물었습니다. 
덕산: “이 근방에 혹 훌륭한 선지식이 계시는지요?”
노파: “이 길로 곧장 올라가시면 용담원이라는 절이 있습니다.”
덕산스님은 그 길로 용담원에 들어가 이런 말을 합니다.
덕산: “용담에 못은 있으나 용은 없구나!”
용담: “용담에 잘 왔네!”
[출처] 덕산스님과 금강경이야기 (화엄선원) |작성자 지행에서 모셔온 글입니다.

 

이 문답도 재미있다. 용담이라면 연못에 용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덕산 스님은 용담원에 가서 한다는 말이

“용담에 못은 있으나 용은 없구나!”라는 말을 한다.

용담에서 용을 보지 못한 것은 덕산의 허물일 뿐이다.

그런데 그 내용을 남 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재미있는 점은 스님의 법명이 용담이라는 것이다.

용담이라면 이는 해인 삼매 자리로 보아도 되기 때문에 묘한 은유가 있어 보인다.

 

 

 

덕산 선사가 용담 선사에게 가던 날 밤 용담 선사의 방에서 밤이 깊었다.
용담 선사가 말하였다.
"그대는 그만 내려가 보게나."
덕산 선사가 쉬려고 발을 걷고 나가다가 바깥을 보니 캄캄하였다. 돌아서서 말하였다.
"화상이시여, 바깥이 캄캄합니다."
용담 선사가 촛불을 켜서 건네주다가 (傳燈)

덕산 선사가 막 촛불을 잡으려고 하는 찰나에 곧바로 촛불을 불어서 꺼버렸다.
덕산 선사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지금부터는 다시는 천하의 노화상들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겠노라."라고 하고
드디어 금강경의 소초들을 가져서 법당 앞에 쌓아두고는 횃불을 높이 들고 크게 외쳤다.
"모든 현묘한 이치를 다 말하더라도 마치 터럭 하나를 저 허공에다 두는 것과 같고,
세상의 온갖 중요한 일을 다 하더라도 마치 물 한 방울을 큰 바다에 던지는 것과 같다."라고 하면서

금강경소초를 들고 말하였다.
"그림의 떡은 주린 배를 채울 수 없다."라고 하고는 곧바로 태워버렸다.
그리고 용담 선사에게 예배를 올리고 떠나버렸다.

 

이 이야기는 남에게 귀의하지 말고 자귀의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스스로 알고 스스로 보고 스스로 깨달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전까지 덕산 스님은 금강경을 공부한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부처님 께서 깨우치신 것을 외우고 있는 것이었지

스스로 그러함을 알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금강경이 덕산스님을 굴렸지

덕산스님께서 금강경을 굴리시진 못한 것입니다.

마치 육조단경의 법달이 법화경에 굴림을 당한 것과 유사합니다.

이렇게 보니 두 이야기는 내용 및 순서가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허허! 참~!

 

중국에서 갈애 부숨에 대한 큰 경을 이야기로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