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블로그에서 글을 읽으시다가
혹시 저를 '전생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생각하는 것 아냐?'하고 오해할 것 같아서 이 글을 올립니다.
저는 누누히 말씀드렸지만 부처님의 깨달음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삼명(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수 많은 전생을 모두 아시게 되는 숙명통을 먼저 얻으시고
그 다음에 이렇게 수 많은 (최소한 10만생) 케이스 스터디를 통해서
다른 사람과 나의 주변의 관계 뿐만 아니라
남들의 운명까지도 알게 되시는 천안통을 얻으시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의 모습을 석연히 아시게 되자
이 중생세간에 대한 이해가 끝나시고 (무명 타파)
이에 따라서 탐하거나 진하는 것 번뇌가 사라지십니다(누진통).
다른 말로 하자면 번뇌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는 방법은 삼명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숙명통과 천안통만 본다면 전생의 '업'이란 것이 매우 중요해 보이고
현재의 내 모습은 과거 전생의 업이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만 이해하게 되면 우리의 전생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세상일은 꼭 그렇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계속해서 선택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것이 연기법입니다.
전생에 조건지워져 현생이 형성되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나의 행동을 바꾼다면 그 조건이 또 변화하는 것이므로
나의 내생은 나의 현재 행동에 따라서 변화할 수 있게 됩니다.
지나간 과거야 어쩔 수 없다 쳐도
현재의 내 행동에 따라 나의 미래가 창조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있는 당연한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만약 지금 나의 행동이 과거의 습에 따라서 행동을 한다면
전생이 중요한 것을 대부분 결정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나라는 존재를 중심에 세우는 감각적인 욕망이나 성냄, 해꼬지에 기반하지 않고
중도의 삶인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에 기반해서 행동을 한다면
우리는 과거의 업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 그렇게 팔정도의 삶을 살라고 알려주십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이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다.'는 의견이 틀렸다고 분명하게 알려 주십니다. (A3:61 외도의 주장 경)
만약 모든 것이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다면
내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건 모두 전생의 업에서 기인한 것이되며
내가 해야할 것(선행)과 하지 말아야 할 것(악행)에 혼란이 생기며
수행조차 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윤회라는 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윤회하는 이유인 번뇌를 소멸시킨다면 (누진통)
전생이니 현생이니 내생이니 하는 것에서 벗어나 열반에 들 수 있다고 알려주십니다.
상황이 이렇다면 우리는 전생 타령하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팔정도에 맞게 여법하게 재가자로서 살고
더 나아가 수행을 통해서 열반에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M38 갈애부숨에 대한 큰 경에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주십니다.
55.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아서
‘우리는 과거세에 있었을까? 우리는 과거세에 없었을까? 우리는 과거세에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과거세에 어떻게 지냈을까? 우리는 과거세에 무엇이었다가 무엇으로 변했을까?’라고 과거로 치달을 수 있는가?”
“세존이시여, 그럴 수 없습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아서 ‘우리는 미래세에 있을까? 우리는 미래세에 없을까? 우리는 미래세에 무엇이 될까? 우리는 미래세에 어떻게 지낼까? 우리는 미래세에 무엇이 되어 무엇으로 변할까?’라고 미래로 치달을 수 있는가?”
“세존이시여, 그럴 수 없습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아서 ‘우리는 있는가? 우리는 없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있는가? 이 존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라고 또한 현세에 이것에 대해 내적으로 당혹해 할 수 있는가?”
“세존이시여, 그럴 수 없습니다.”
즉 연기법을 이해했다면 '나라는 존재'에 억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는 지나갔고 현재의 내 행동이 내 미래를 만들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존재의 윤회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전생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잘못된 견해에 사로잡힌다면
혹은 좀 더 큰 시각으로 삼세의 존재가 나라는 잘못된 견해에 사로잡힌다면
우리는 끊임없는 윤회의 삶을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A3:61 외도의 주장 경(Tittha-sutta)
1. “비구들이여, 세 가지 외도의 주장이 있다. 현자들이 그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집요하게 이유를 묻고 반복해서 질문하면 그것은 [스승 등의] 계보에는 이르겠지만 결국에는 [업]지음 없음에 도달하고 만다. 어떤 것이 셋인가?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바라문은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바라문은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신이 창조했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바라문은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
2. “비구들이여, 나는 이 가운데서 ‘사람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이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그대 존자들이 ‘사람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이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것이 사실인가?’
비구들이여, 내가 이와 같이 물었을 때 그들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 존자들이 생명을 죽이더라도 그것은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일 테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더라도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일 테고, 삿된 음행을 하더라도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일 테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일 테고, 헐뜯는 말을 하더라도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일 테고, 욕설을 하더라도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일 테고, 잡답을 하더라도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일 테고, 탐욕스럽더라도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일 테고, 마음이 악의로 가득하더라도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일 테고, 삿된 견해를 가지더라도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일 테다.’
비구들이여, ‘모든 것은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다.’라고 진심으로 믿는 자들에게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하려는] 열의와 노력과 [하지 않으려는] 열의와 노력이 없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진실함과 확고함을 얻지 못하고 마음 챙김을 놓아버리고 [여섯 가지 감각기능의 문을] 보호하지 않고 머물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스스로 정당하게 사문이라고 주장하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그런 주장과 그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에 대한 나의 첫 번째 정당한 논박이다.”
3. “비구들이여, 나는 그 가운데서 ‘사람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신이 창조했기 때문이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그대 존자들은 ‘사람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신이 창조했기 때문이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것이 사실인가?’ 내가 이와 같이 물었을 때 그들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 존자들이 생명을 죽이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삿된 음행을 하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헐뜯는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욕설을 하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잡담을 하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탐욕스럽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마음이 악의로 가득하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삿된 견해를 가지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다.’
비구들이여, ‘모든 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이다.’라고 진심으로 믿는 자들에게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하려는] 열의와 노력과 [하지 않으려는] 열의와 노력이 없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진실함과 확고함을 얻지 못하고 마음 챙김을 놓아버리고 [여섯 가지 감각기능의 문을] 보호하지 않고 머물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스스로 정당하게 사문이라고 주장하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그런 주장과 그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에 대한 나의 두 번째 정당한 논박이다.”
4. “비구들이여, 나는 그 가운데서 ‘사람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그대 존자들은 ‘사람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것이 사실인가?’
내가 이와 같이 물었을 때 그들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 존자들이 생명을 죽이더라도 그것은 원인도 없을 것이고 조건도 없을 것이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더라도 그것은 원인도 없을 것이고 조건도 없을 것이고, 삿된 음행을 하더라도 그것은 원인도 없을 것이고 조건도 없을 것이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원인도 없을 것이고 조건도 없을 것이고, 헐뜯는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원인도 없을 것이고 조건도 없을 것이고, 욕설을 하더라도 그것은 원인도 없을 것이고 조건도 없을 것이고, 잡담을 하더라도 그것은 원인도 없을 것이고 조건도 없을 것이고, 탐욕스럽더라도 그것은 원이도 없을 것이고 조건도 없을 것이고, 마음이 악의로 가득하더라도 그것은 원인도 없을 것이고 조건도 없을 것이고, 삿된 견해를 가지더라도 그것은 원인도 없을 것이고 조건도 없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어떤 것에도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라고 진심으로 믿는 자들에게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하려는] 열의와 노력과 [하지 않으려는] 열의와 노력이 없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진실함과 확고함을 얻지 못하고 마음 챙김을 놓아버리고 [여섯 가지 감각기능의 문을] 보호하지 않고 머물기 때문에 자기들 스스로 정당하게 사문이라고 주장하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그런 주장과 그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에 대한 나의 세 번째 정당한 논박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세 가지 외도의 주장이 있다. 현자들이 그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집요하게 이유를 묻고 반복해서 질문하면 그것은 [스승들의] 계보에는 이르겠지만 결국에는 [업]지음 없음에 도달하고 만다.”
5. “비구들이여, 내가 설한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게 논박당할 수 없고 오염될 수 없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 받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게 논박당할 수 없고 오염될 수 없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 받지 않는 내가 설한 법은 어떤 것인가?
(1)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섯 가지의 요소[界]가 있다.’라고 내가 설한 이 법은 현명한 사문과 바라문들에게 논박될 수 없고 오염될 수 없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 받지 않는다.
(2)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觸處]가 있다.’라고 내가 설한 이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게 논박될 수 없고 오염될 수 없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 받지 않는다.
(3) 비구들이여, ‘이러한 열여덟 가지 마음의 지속적인 고찰이 있다.’라고 내가 설한 이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게 논박될 수 없고 오염될 수 없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 받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가 있다.’라고 내가 설한 이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게 논박될 수 없고 오염될 수 없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 받지 않는다.”
6.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섯 가지의 요소[界]가 있다.’라고 내가 설한 이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게 논박될 수 없고 오염될 수 없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 받지 않는다고 설했다. 이것은 무엇을 조건하여 설했는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섯 가지 요소가 있다. 땅의 요소[地界], 물의 요소[水界], 불의 요소[火界], 바람의 요소[風界], 허공의 요소[虛空界], 의식의 요소[識界]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섯 가지의 요소가 있다.’라고 내가 설한 이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게 논박될 수 없고 오염될 수 없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 받지 않는다고 설한 것은 이것을 조건하여 설했다.”
7.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觸處]가 있다’라고 내가 설한 이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게 논박될 수 없고 오염될 수 없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 받지 않는다고 설했다. 이것은 무엇을 조건하여 설했는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있다. 눈의 감각접촉의 장소, 귀의 감각접촉의 장소, 코의 감각접촉의 장소, 혀의 감각접촉의 장소, 몸의 감각접촉의 장소, 마노의 감각접촉의 장소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있다.’라고 내가 설한 이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게 논박될 수 없고 오염될 수 없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 받지 않는다고 설한 것은 이것을 조건하여 설했다.
8. “비구들이여, ‘이러한 열여덟 가지 마음의 지속적 고찰이 있다.’라고 내가 설한 이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게 논박될 수 없고 오염될 수 없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 받지 않는다고 설했다. 이것은 무엇을 조건하여 설했는가?
(1) 눈으로 형상을 볼 때 정신적 즐거움의 기반이 되는 형상을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정신적 괴로움의 기반이 되는 형상을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평온의 기반이 되는 형상을 지속적으로 고찰한다.
(2) 귀로 소리를 들을 때 정신적 즐거움의 기반이 되는 소리를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정신적 괴로움의 기반이 되는 소리를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평온의 기반이 되는 소리를 지속적으로 고찰한다.
(3) 코로 냄새를 맡을 때 정신적 즐거움의 기반이 되는 냄새를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정신적 괴로움의 기반이 되는 냄새를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평온의 기반이 되는 냄새를 지속적으로 고찰한다.
(4) 혀로 맛을 볼 때 정신적 즐거움의 기반이 되는 맛을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정신적 괴로움의 기반이 되는 맛을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평온의 기반이 되는 맛을 지속적으로 고찰한다.
(5) 몸으로 감촉을 느낄 때 정신적 즐거움의 기반이 되는 감촉을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정신적 괴로움의 기반이 되는 감촉을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평온의 기반이 되는 감촉을 지속적으로 고찰한다.
(6) 마노로 법을 알 때 정신적 즐거움의 기반이 되는 법을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정신적 괴로움의 기반이 되는 법을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평온의 기반이 되는 법을 지속적으로 고찰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열여덟 가지 마음의 지속적인 고찰이 있다.’라고 내가 설한 이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게 논박될 수 없고 오염될 수 없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 받지 않는다고 설한 것은 이것을 반연하여 설했다.
9. “비구들이여, ‘이러한 네 기자 성스러운 진리[四聖諦]가 있다.’라고 내가 설한 이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게 논박될 수 없고 오염될 수 없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 받지 않는다고 설했다. 이것은 무엇을 조건하여 설했는가?
여섯 가지 요소에 의지하여 모태에 들어감이 있다.
듦이 있을 때 정신∙물질[名色]이 있다.
정신∙물질을 조건하여 여섯 가지 감각장소[六入]가 있다.
여섯 가지 감각장소를 조건하여 감각접촉[觸]이 있고, 감각접촉을 조건하여 느낌[受]이 있다.
비구들이여, 나는 느낌을 느끼는 자에게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천명하고,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천명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천명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이다.’라고 천명한다.”
10.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인가?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병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나 등으로]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 자체가 괴로움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라고 한다.”
11.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集聖諦]인가?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行]들이,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물질이,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있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라고 한다.”
12.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滅聖諦]인가?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형성이[行]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기 때문에 의식이 소멸하고, 의식이 소멸하기 때문에 정신∙물질(명색)이 소멸하고, 정신∙물질이 소멸하기 때문에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고,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소멸하고, 감각접촉이 소멸하기 때문에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에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취착이 소멸하고, 취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라고 한다.”
13.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의 성스러운 진리[道聖諦]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의 구성요소로 된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니,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삼매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의 성스러운 진리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가 있다.’라고 내가 설한 이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게 논박될 수 없고 오염될 수 없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 받지 않는다고 설한 것은 이것을 반연하여 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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