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법화경의 일불승은 돈오의 다른 표현이다!

우암(雨庵) 2015. 8. 26. 22:43

법화경에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오직 한가지 부처(佛)일 뿐이라고(一佛乘)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중생들이 알고 있는 삼승(三乘)이란 궁극적인 지혜가 아니라 방편에 불과하다고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법화경을 보면서 제가 갖고 있던 문제점은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궁극적인 지혜(일불승)를 이룰 수 있는 지

그 방법을 법화경 가르침에서 찾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 관련해서는 법화경이 요의경이냐 아니냐는 원효 스님의 설명도 있다고 합니다.

원효스님께서는 요의경이라고 결론을 내려 주셨다고 합니다.)

 

저는 법화경의 일불승이 육조단경의 돈오와 같은 개념이어서

'진여의 본래 성품을 단박 보는 것'이라고 말씀드리려 합니다.

 

삼승(三乘)이란 세 가지 수레입니다.

여기서 승(乘)이란 부처님 가르침에 의해서

윤회하는 중생 세계로부터 벗어나 열반에 이르는 것을

수레(乘)를 타고 벗어나는 것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 세 가지 수레는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입니다.

 

제가 이해하고 있는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문승(聲聞乘)이란 경전에 나타난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레삼아 수행하는 방법입니다.

즉 경전 공부를 열심히 하는 수행 방법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이치는 이해하겠지만,

이 방법의 문제점은 수행이 없어서 스스로 확인하지는 못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연각승(緣覺乘)이란 경전 공부에 더해서 스스로 수행도 하여 연기를 체득하는 것이 그 수행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수행을 통해서 숙명통, 천안통을 얻어 연기를 알게되어 깨달음에 도달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홀로 연기(緣起)의 이치를 주시하여 깨달은 자. 혹은 홀로 자신의 깨달음만을 구하는 수행자라고 한답니다.

벽지불(辟支佛)이라고도 하고

팔리어로는 pacceka-buddha라 하며 홀로 깨달은 자라는 뜻입니다.

pacceka : [paṭi+eka] separate; each; various; single, 獨一的, 單獨的
paṭi: prefix having the meanings; against; opposite, towards, in opposition to

보살승(菩薩乘)이란 경전을 공부하고 수행을 하여 연기법을 체득하였다면, 그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결실인 지혜와 자비를  펼쳐서,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실천하는 수행 방법입니다. 즉 중생세간의 연기를 알아서 중생의 괴로움을 덜어주고자 그 깨달음의 지혜와 자비를을 펼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승 불교(大乘 mahāyāna)입니다.

 

대승과 대비되는 개념이 소승불교(小乘 hīnayāna)입니다. 소승이란 성문과 연각을 말합니다. 성문과 연각을 소승이라 대승 불교에서 폄하한 이유는 중생의 괴로움을 덜어주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많은 글에서 나타납니다. 언어적으로는 그럴듯한 말이지만 저는 대승과 소승을 구분하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문이든 연각이든 만약 깨달음에 도달한다면 그 이후에는 당연히 중생들의 괴로움을 덜어주고자 마음을 내셨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이야기하자면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선언하는 한국 대승불교에서 중생의 괴로움을 덜어주는데 있어서 과연 한국 스님들께서 남방 불교의 스님들 대비 얼마나 실천적으로 앞서 있는가라는 질문을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깨달음의 결과가 지혜와 자비라면 수행 초기에 어떤 마음 가짐이었느냐에 무관하게 그 깨달음의 결과를 드러내실 수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스님들께서 얼마나 수행의 공덕을 갖추고 있느냐의 문제로 환원될 것입니다. 소승불교냐 대승불교냐는 핵심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법화경에서 재미있는 점은 바로 이러한 지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일불승(一乘 ekāyanamagga)입니다.

법화경에서는 삼승(三乘)이란 궁극적인 지혜가 아니라 방편에 불과하다고 알려주십니다.

대승, 소승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성문, 연각, 보살이 중요한 것이 아니며

자성 자리를 깨달으라는 그 일승을 말씀해 주신 것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법화경 화성유품의 내용이 바로 그 비유인 것 같습니다.

 

34 비유컨대, 마치 오백 유순이나 되는 험난한 길에 인적마저 끊어진 무서운 곳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지나서 보물이 있는 곳으로 가고자 하였느니라.


35 이 때 한 인솔하는 이가 총명하고 지혜가 많고 이 험한 길의 통하고 막힌 형편을 잘 알아서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이 험난한 길을 통과하고 있었느니라. 데리고 가는 사람들이 중도에서 물러갈 마음이 생겨 인솔하는 사람에게 말하였느니라.

‘우리들이 극도로 피로하고 또 무서워서 다시 더 나아갈 수 없고 앞길은 아직도 매우 머니 이제 그만 되돌아갈까 합니다.’

인솔하는 이가 방편이 많아서 이렇게 생각하였느니라.

‘참으로 애석하구나. 이 사람들은 어찌하여 큰 보물을 구하지 않고 물러가려 하는가.’

이렇게 생각하고는 방편으로써 험난한 길에서 삼백 유순을 지나서 한 마을을 변화하여 만들어 놓고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였느니라.

‘그대들은 무서워하지 말고 되돌아가지도 말라. 저기 큰 마을이 있으니 그 안에서 마음대로 즐길 수 있으리라. 만약 저 마을에 들어가면 편안히 살 수도 있고 앞으로 더 나아가면 보물이 있는 곳에도 갈 수가 있으리라.’

이 때에 피로해 있던 사람들이 매우 기뻐하며 처음 보는 일이라고 찬탄하였느니라.

‘우리가 이제는 험한 길을 벗어나서 편안함을 얻었노라.’

이리하여 여러 사람들은 변화하여 만든 마을[化城]에 들어가서, ‘이미 지나 왔다’는 생각을 하고, ‘편안하다’는 생각을 하였느니라.

이 때 인솔하는 사람은 이 사람들이 잘 쉬어서 더 이상 피로하지 않은 줄을 알고는 변화하여 만든 마을을 없애버리고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였느니라.

‘그대들은 앞으로 나아가자. 보물이 있는 곳이 멀지 않다. 아까 있던 마을은 내가 조작하여 만든 것이다. 임시로 쉬어가기 위한 것이었다.’

 

36 여러 비구들이여, 여래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여래는 지금 그대들의 인솔자가 되었느니라. 죽고 사는 번뇌의 악도(惡道)는 험난하고 먼 것과 갈 만한 데와 건널 만한 데를 알건마는, 중생들이 다만 일불승만을 들으면 부처님을 보려고 하지도 않고 친근하려고 하지도 않느니라. 곧 생각하기를 ‘부처님이 되는 길은 멀고도 멀어서 오래오래 애쓰고 닦아야 이룰 수 있으니라.’고 하느니라.

부처님은 그들의 마음이 겁이 많고 용렬한 줄 알고 방편을 써서 중도에서 쉬게 하기 위하여 두 가지 열반을 말하였느니라.

만일 중생이 두 번째 지위에 머무르면, 그때에 여래는 이렇게 말씀하느니라.

‘그대들은 할 일을 아직 다하지 못하였으며, 그대들이 머물러 있는 지위는 부처님의 지혜에 가까울 뿐이니라. 마땅히 잘 관찰하고 헤아려 보라. 얻었다는 열반이 진실한 것이 아니니라. 다만 여래가 방편으로써 일불승에서 나누어 삼승을 말한 것 뿐이니라.’

 

37 마치 저 인솔하는 사람이 쉬어가기 위하여 조작하여 만든 마을과 같으니라. 이미 편히 쉰 것을 알면 다시 말하기를 ‘보물이 있는 곳이 멀지 아니하고, 이 마을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조작하여 만든 것이니라.’고 하느니라.”

화성(化城)이란 임시로 만든 마법의 성이란 뜻입니다. (화성이란 化身佛의 모습이라고 해도 됩니다.)

 

이 비유에서 인솔하는 이란 부처님이시고, 마법의 성(화성)이란 성문, 연각, 보살이며, 보물이 있는 곳이란 열반입니다.

 

그리고 법화경에서 나타나는 일불승이란 육조단경에서 나타나는 돈오(頓悟)가 아닐까 합니다.

돈오란 '진여의 본래 성품을 단박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500유순에 돈오가 있다면 300유순에 있는 화성은 돈오가 아닙니다.

다시말해 '진여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에는 '보았다'와 '보지 않았다'만 있다는 말입니다.

그 수행 방법이 성문이든, 연각이든, 보살이든 보지 못했다면 무명이요 번뇌에 휩쌓여 있는 것이며

보았다면 무념의 그 자리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불승이 돈오와 같은 개념이어서

'진여의 본래 성품을 단박 보는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일불승을 대승을 가르킨다고 설명하고 계십니다.
즉 보살승이 일불승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승 즉 성문 연각은 스스로의 열반 만을 주장해서 소승이라 한다고 주장하십니다.

 

제 지금의 이해로는 열반자리에서는
언어나 개념으로 표현된 것이라면 성문, 연각, 보살이 모두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육조스님께서 무념을 종으로 삼으신다고 알려주신 겁니다.

 

"善知識아 我自法門은 從上已來로 皆立無念爲宗하야 無相爲體하며 無住爲本이니라
 선지식    아자법문    종상이래     개립무념위종       무상위체       무주위본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옛 부터 모두가 생각 없음(無念)을 세워 종(宗)으로 삼으며 모양 없음(無相)으로 본체를 삼고 머무름 없음(無住)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법화경 삼계화택의 비유에서도 성문, 연각, 보살을 세 종류의 마차에 비유하시고
(양의 수레(성문승), 사슴의 수레(연각승), 소의 수레(보살))
일불승을 흰 소가 끄는 수레로 다른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만약 보살승(대승)이 일불승이라면 왜 또 다시 흰 소가 끄는 수레를 세우셨겠습니까?

보살승과 일불승이 모두 소의 수레아니냐구요?

제 생각에는 일불승은 물들지 않았기에 (virāga: 離貪, 離, 遠離) 흰소라고 하셨다고 봅니다.

원효대사께서도 법화경종요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십니다.


"言無別者. 三種平等.
 언무별자. 삼종평등.

諸乘諸身皆同一揆. 世間涅槃永離二際故.
제승제신개동일규. 세간열반영리이제고.


분별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 가지가 평등하다는 것인데
모든 수행 방법과 모든 몸(사람)이 모두 같다고 헤아리는 것이니,
세간과 열반이라는 두 가지 극단을 영원히 떠났기 때문이다."


三種平等 즉 성문, 연각, 보살 모두 마찬가지라는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물들지 않는 자리에서는 그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부처님 말씀의 요지를 아는 것(일불승)이 중요하지
그 수행 방법이 부처님 가르침의 테두리 안에 있다면
그 수행 방편의 우열을 가리느라 힘 쏟을 필요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일불승 즉 돈오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보면 법화경은 요의 경전이 되네요!^^ _()_

 

법화경 사구게

 

제법종본래(諸法從本來)      모든 법은 본래부터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      항상 스스로 고요한 모습이니
불자행도이(佛子行道已)      불자가 이런 도를 닦는다면
내세득작불(來世得作佛)      미래에 부처가 되리라.

 

아래에는 돈오 내용이 있는 육조단경입니다.

 

8. 無 念 (무념: 생각이 없음)

善知識아 法無頓漸이로되
선지식   법무돈점
人有利鈍이라 迷卽漸契하고 悟人은 頓修하나니
인유이둔       미즉점계       오인     돈수
識自本心이 是見本性이라
식자본심    시견본성      
悟卽元無差別이로되 不悟면 卽長劫輪廻니라
오즉원무차별          불오    즉장겁윤회

 

선지식들아. 법에는 단박 깨침과 점차로 깨침이 없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영리하고 우둔함이 있으니, 미혹하면 점차로 계합하고 깨친 이는 단박에 닦느니라.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 본래의 성품을 보는 것이다.
깨달으면 원래로 차별이 없으나 깨닫지 못하면 오랜 세월을 윤회하느니라.

 

18. 頓 悟 (돈오: 단박에 깨침).

 

善知識아 我於忍和尙處에 一聞하고 言下에 大悟하야 頓見眞如本性이라
선지식    아어인화상처    일문        언하    대오       돈견진여본성
是故將此敎法하야 流行後代하야
시고장차교법       유행후대      
令學道者로 頓悟菩提하야 各自觀心하야 令自本性을 頓悟케 하니라
영학도자    돈오보리       각자관심       영자본성     돈오

 

선지식들아. 나는 오조 홍인화상의 회하에서 한번 듣자 그 말끝에 크게 깨쳐 진여의 본래 성품을 단박에 보았느니라.
이러므로 이 가르침의 법을 뒷세상에 유행시켜
도를 배우는 이로 하여금 보리를 단박에 깨쳐서 각기 스스로 마음을 보아 자기의 성품을 단박 깨치게 하는 것이다.


若不能自悟者는 須覓大善知識示導로 見性이니라
약불능자오자    수멱대선지식시도     견성
何名大善知識고
하명대선지식
解最上乘法이 直示正路가 是大善知識이며 是大因緣이라
해최상승법    직시정로    시대선지식        시대인연
所謂化導令得見佛이니 一切善法이 皆因大善知識能發起라
소위화도영득견불       일체선법    개인대선지식능발기

 

만약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이는 모름지기 큰 선지식을 찾아서 지도를 받아 자성을 볼 것이니라.
어떤 것을 큰 선지식이라고 하는가?
최상승법을 이해하여 바른 길을 곧게 가리키는 것이 큰 선지식이며 큰 인연이다.
이는 이른바 교화하고 지도하여 부처를 보게 하는 것이니, 모든 착한 법이 다 선지식으로 말미암아 능히 일어나느니라.


故三世諸佛과 十二部經이 云在人性中하야 本自具有로되
고삼세제불    십이부경    운재인성중        본자구유
不能自性悟하면 須得善知識示導하야 見性이니라
불능자성오       수득선지식시도        견성

 

그러므로 삼세의 모든 부처와 십이부의 경전들이 사람의 성품가운데 본래부터 스스로 갖추어져 있다고 말할지라도,
능히 자성을 깨치지 못하면 모름지기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자성을 볼지니라.


若自悟者는 不假外善知識이니
약자오자    불가외선지식
若取外求善知識하야 望得解脫하면 無有是處요
약취외구선지식       망득해탈       무유시처
識自心內善知識하면 卽得解脫이니라
식자심내선지식       즉득해탈

 

만약 스스로 깨침이라면 밖의 선지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만약 밖에서 선지식을 구하여 해탈을 얻기를 바란다면 그런 것은 없다.
자기 마음속의 선지식을 알면 곧 해탈을 얻느니라.

 

假 거짓 가, 멀 하, 이를 격 1. 거짓 2. 가짜 3. 임시(臨時) 4. 일시 5. 가령(假令) 6. 이를테면 7. 틈, 틈새 8. 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