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삼명과 무색계 사선정은 같은 내용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요?

우암(雨庵) 2015. 9. 7. 13:15

제게 갑자기 삼명과 무색계 사선정은 같은 내용이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저 제가 쓰는 소설이라 생각하여 주세요. (제 이해일 뿐입니다.)

저는 요즘 삼명으로 불교 경전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에 도달하실 때
숙명통-천안통-누진통으로 설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숙명통 천안통을 오안중에서 천안을 얻으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수 많은 전생의 삶을 복기하실 수 있게 된 것이란 이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 전체를 꿰뚫는 이해가 생기자 탐진치에서 벗어나면서 지혜가 열리며 (혜안)

 

그래서 생의 법칙성을 찾아내신 것이 연기법이고 사성제라고 이해합니다. (법안)


그래서 중생을 제도하시는 부처님이 되셨죠. (불안)

 

그만큼 저는 숙명통과 천안통을 중시합니다. (전생의 문제를 중시합니다.)
(일대사 인연의 현상을 바라다 보는 것이 번뇌 이해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본론으로 들어가서
그렇다면 어떻게 삼명과 무색계사선정이 같은 것인가를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일단 무색계란 arupa인데 정확한 번역은 비색계가 아닐까합니다.

즉 색계가 아니란 것이지요.

그리고 색계란 이 몸과 관련된 느낌이 오는 곳이고

비색계란 이 몸과는 상관없는 것이 오는 계가 아닐까합니다.

예를 들자면 전생의 모습에 대한 것이죠.

 

공무변처라는 것은
물질(rupa; 몸)에 대한 인식을 초월하고

부딪힘(적의paṭigha)의 인식을 소멸하여

무한한 허공이라는 인식이 현전하는 선의 마음이 머무는 곳으로

저는 부처님 가르침을 정리를 했습니다.

 

공무변처란 내 마음대로 시공간을 이동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신족통)
물질에 대한 인식을 초월했다는 말은 눈 앞의 물질에 대한 초월의 이야기로 읽었습니다.

이런 것이 가능하려면 남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사라지는 자비의 마음이 있어야

비로서 전생의 세계(눈 앞에 현전하는 물질을 극복한 곳)로 갈 수 있다는 말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숙명+천안의 시작)

 

물질(rūpa)에 대한 인식(saññā)을 완전히 초월하고     sabbaso rūpasaññānaṃ samatikkamā
부딪힘(paṭigha)의 인식을 소멸하고                            paṭighasaññānaṃ atthaṅgamā
갖가지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                nānattasaññānaṃ amanasikārā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ananto ākāso’ti
공무변처(空無邊處)를 구족하여 머문다.                     ākāsānañcāyatanaṃ upasampajja viharati

(M77 훌륭한 가문의 우다인에 대한 큰 경 (Mahāsakuludāyisutta)에서, 아래서도 마찬가지)

 


식무변처
내 과거 전생의 업식(전생의 삶)이 끊임없이 많다는 것이라고 저는 이해해 봅니다.
그래서 전생의 삶들을 수없이 보게 되는데

그래서 육신통에서 '하나(현생의 나)가 여럿(전생의 나들)이 되고하는' 말들이 나타나는 것은 아닐런지요? (숙명+천안)

그래서 그 (전생의) 식이란 무궁무진하게 많다는 이해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 식이란 유식의 아뢰야식이 되겠네요.

 

무한한 의식 세계 성취 (viññāṇañcāyatanaṃ 식무변처 realm of infinity of intelligence)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sabbaso ākāsānañcāyatanaṃ samatikkamma
‘무한한 알음알이(식(識))’라고 하면서             ‘anantaṃ viññāṇan’ti
식무변처(識無邊處)를 구족하여 머문다.          viññāṇañcāyatanaṃ upasampajja viharati

 


무소유처
누겁으로 쌓여온 나와 남의 업식(전생) 및 그 관계를 살펴 보니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며
모든 세상의 일이란 것들이 조건지워져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닐런지요? (숙명+천안의 이해)

 

아무것도 없는 세계 성취 (ākiñcaññāyatanaṃ 무소유처)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sabbaso viññāṇañcāyatanaṃ samatikkamma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natthi kiñcī’ti
무소유처(無所有處)를 구족하여 머문다.             ākiñcaññāyatanaṃ upasampajja viharati


 

비상비비상처
내게 인식된 것(想 사용된 업의 배경 경향성)도 내게 인식되지 않은 것(非想 사용되지 않은 업의 배경 경향성)도
모두 조건 지워진 것이고(본질이 없는 것이고) 내가 아니라는 경지이구요.
이 부분이 누진 즉 번뇌를 소멸하는 단계로 접어드는 것으로 보입니다. (숙명+천안의 이해)

다시 말해 그 어느 것도 나의 것이 아니라면

내가 잡고 있는 그 나라는 생각때문에 계교하던(치심, 어리석음)

내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욕망(탐심), 그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 드러나던 성냄(성냄)

이 삼독심 번뇌에서 벗어날 기반이 마련된 것입니다.

 

지각(saññ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 성취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ṃ 비상비비상처)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sabbaso ākiñcaññāyatanaṃ samatikkamma
비상비비상처를 구족하여 머문다.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ṃ upasampajja viharati

 


마지막으로 상수멸정이란
완전한 누진이 되어서 탐진치가 벗어난 단계란 이해입니다.

 

지각(saññā)과 느낌의 소멸 (saññāvedayitanirodhaṃ 상수멸정)
일체 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sabbaso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ṃ samatikkamma
상수멸을 구족하여 머문다.                  saññāvedayitanirodhaṃ upasampajja viharati

 

M111. 차례 차례의 경 (Anupadasutta)

20. 나아가 수행승들이여, 싸리뿟따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를 완전히 뛰어넘어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했다. 그리고 그는 지혜로서 보아 번뇌를 부수었다.

 


욕계, 색계, 무색계에서 무색계란 바로 전생의 세상이 펼쳐지는 곳은 아닐까요?
그래서 눈 앞의 색이 아니라고(arupa) 하신 것이구요.
(무색계 천이란 것이 전생이 펼쳐지는 곳???)

 

갈애(taṇhā)에서도
감각적인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bhavāya), 비존재(vibhavāya)에 대한 갈애가 있습니다.
이중 비존재란 무엇일까요? 바로 무색계의 존재(과거 전생의 존재; 현재의 rupa와 떨어져 (vi; 분리되어) 있는 것)로 설명하신 것은 아닐런지요?

 

10개의 족쇄에서 나타나는 무색에 대한 탐욕(arūpa-rāga)고 결국 이 문제 아닐까요?

유신견-의심-계금취-감각적 욕망-악의-색에 대한 탐욕(rūpa-rāga)-무색에 대한 탐욕(arūpa-rāga)-자만-들뜸-무명

 

제가 본 바에는 깨달음의 경지를 설명할 때
삼명과 무색계 사선정을 동시에 설명하시는 경우는 없었는데... (경을 모두 본게 아니라서 확인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누진통과 상수멸을 같은 위치에 놓으시는 것 같습니다.

 

M66 메추라기에 대한 비유의 경

§28 공무변처(空無邊處)의 성취 : 충분하지 않으니 버리고 뛰어야 함
§29 식무변처(識無邊處)의 성취 : 충분하지 않으니 버리고 뛰어야 함
§30 무소유처(無所有處)의 성취 : 충분하지 않으니 버리고 뛰어야 함
§31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성취 : 충분하지 않으니 버리고 뛰어야 함
§32 상수멸(想受滅)의 성취 : 뛰어넘는다는 것은 바로 이것

 

 

오늘 아침에 갑자기 든 생각이라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참! 세존께서는 이런 존재에 대한 견해는 조심해야 한다고 알려주십니다.
즉 전생을 관찰하려고 추구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M2. 모든 번뇌의 경 (Sabbāsavasutta)


§9.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말아야 할 것들에 정신활동을 기울이고, 정신활동을 기울여야 할 것들에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번뇌가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번뇌가 성장한다. 그는 이와 같이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울인다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없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어떻게 지냈을까?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다가 무엇으로 변했을까?

 

나는 미래세에 있을까?
나는 미래세에 없을까?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될까?
나는 미래세에 어떻게 지낼까?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되어 무엇으로 변할까?

 

또는 현세에 이것에 대해 의심한다.
나는 있는가?
나는 없는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있는가?
이 존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이와 같이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여섯 가지 견해 가운데 하나의 견해가 생겨난다.

 

‘나의 자아는 있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든가
‘나의 자아는 없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든가
‘자아에 의해서 자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든가
‘자아에 의해서 무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든가
‘무아에 의해서 자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

또는 이와 같이 ‘나의 이 자아는 말하고 느끼고 여기저기서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체험하는데, 그 나의 자아는 항상하고 상주하고 상존하는 것으로 변화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라는 견해가 생겨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견해의 심취, 견해의 붙들임, 견해의 험로, 견해의 왜곡, 견해의 몸부림, 견해의 족쇄라고 부른다. 수행승들이여, ‘견해의 결박에 묶인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한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전생에 대한 이야기로 가르침을 진행하시기 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서 생각을 벗어남을 알려주신 것으로 보입니다.

 

내려 놓음을 통해서 선정을 얻고 전생을 보더라도
그것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이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