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해한 육근이란
부처님 당시 사람들이 갖고있던 그리고 현재 대다수 사람들이 갖고 있는
(눈을 예로 들자면)
'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눈이라고 지칭할 때는
눈이라는 감각작용과 본다는 인식작용이 모두 포함되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에 보니
이 눈이라는 것은
단순히 외부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숙생의 식(가치판단)이 쌓여 있어 작용한다는 점을 주목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식작용에서 식이 제외된 감각작용을 구분하신 것이 육입인 것 같습니다.
즉 육입이란 감각작용인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근이란 인식작용(감각작용+식(업, 습기, 누겁을 통해 내재된 가치판단))이구요.
인식작용이란 12연기에서 '식-명색-육입-촉-수'까지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감각작용이라면 그저 모든 대상이 보여지지만 어디에도 주의가 가지 않아서 생각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바라다 보는 경전적인 근거는 S35:146 업 경 (Kamma-sutta, Kammanirodhasutta) 때문입니다.
업경에서는 육근을 과거 전생의 모든 것이 포함된 것으로 묘사하시는데
그 묘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눈(Cakkhu)은 오래된 업이고 가치 판단의 결과이며 의도의 결과이며 느껴졌던 것입니다.
Cakkhu, bhikkhave, purāṇakammaṃ abhisaṅkhataṃ abhisañcetayitaṃ vedaniyaṃ daṭṭhabbaṃ
purāṇa : [adj.] ancient; old; worn out; used; former
abhisaṅkhata : [pp. of abhisaṅkharoti] prepared; arranged; restored, 為作せる, 造作の
abhisaṅkharoti: [abhi + saṃ + kar + o] restores; arranges; prepares
abhi-:prep. 對(於)~, 向(著)~, 勝(過)~, 越過~, 在~之上, 在~上面
따라서 abhi의 뜻은 뒤의 동사에 대해서 상응해 생긴 이라고 해석해야 할 듯.
즉 abhisaṅkhata란 saṅkhata에 대응하여 생기는 것! 즉 saṅkhata의 결과. saṅkhata란 내가 있는 줄 알고 신구의로 행동하는 것. 따라서 가치판단을 한 것의 결과라 할 수 있다.
saṅkharoti : [saṃ + kar + o] restores; prepares; puts together 為作す, 行作す
Kara ,[fr. kṛ] 1. (adj.) (-°) producing, causing, forming, making, doing
abhisañcetayita: [abhi+saṃ+cita+ṇaya+ta] thought out; intended. 想出,有意的
cetayita : [pp. of cetayitvā] perceived; thought 思念せる, 所思
vedaniya : [=vedanīya, vedeti の grd.] 感受さるべき, 経験すべき
vedeti : [vid + e] feels; senses; knows
즉 우리가 무심결에 사용하는 눈이라고 개념은 전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오래된 업이고 가치판단의 결과이며 의도의 결과이며 느껴졌던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세존께서는 인식의 과정을 정확하게 기술하시기 위해서
감각작용을 인식작용으로 부터 분리하실 필요가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 용어가 육입이 아닐까요?
다시말해
12연기에서 육근(indriya), 육경(ārammaṇa)이 아니라 육입(āyatana)이 나타나는 이유는
12 연기가 누겁을 통해 내재된 가치판단이 지금 이 순간에 작용하는 것을 설명하기 때문에
전생에서 부터 형성된 가치판단이 배제된 현생의 감각작용을 설명하시기 위해
새로운 개념이 필요했고
그래서 육입을 도입한 것으로 제게는 보입니다.
육근, 육경이란 모두 습기(전생부터 누적된 판단)가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습기라는 것이 경험에 의해 조건지워진 것이므로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무아인 것이라고 알려주십니다.
한국에서는 육근을 눈이라는 감각기관으로 보려합니다.
아마도 한문의 영향이 커서 그런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근이라 하면 왠지 감각의 뿌리인 눈 귀 코 혀 몸을 상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해한 육근은 감각기관이 아니라
감각작용인것 같습니다.
빨리어로 근은 indriya인데 그 영어는 faculty로 작용을 뜻합니다.
따라서 육근이란 보는 작용, 듣는 작용, 냄새 맡는 작용, 맛보는 작용, 생각하는 작용 입니다.
우리가 작용을 이야기 한다면 이러한 작용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작용이 일어나야 합니다.
외부에 대상이 있어야하며 동시에 내부에 감각기관이 있어야 하고
감각된 것 중에 내가 주목하는 것이 있어야 하며
그 주목한 것에 대해 내게 유리 불리를 따져보게되고
그래서 내 의도와 그 대상의 상태가 일치하고 일치하지 않음에 따라서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이런 과정이 눈을 기준으로 볼 때 '본다는 작용'일 것입니다. 즉 안근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내용을 풀어서 설명해 주시기 위해서는 감각만을 따로 분리해서 설명하실 필요가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육입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계를 대할 때
우리는 과거의 업식에서 풀려나야 하므로
가면 갈뿐, 보면 볼 뿐을 하라는 말씀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수행을 할 때 육근(indriya)을 수호해야 할까요 아니면 육입처(āyatana)를 수호해야 할까요?
당연히 육근을 수호해야 합니다. (cakkhundriyasaṃvaraṃ)
즉 다생겁의 가치판단이 작용하는 것으로 부터 내 감각작용을 수호(saṃvara)를 하라는 말씀이십니다.
한글로는 saṃvara를 수호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saṃvara의 본래 뜻은 억제하다란 뜻이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합니다.
수호라면 보호를 한다는 의미인데 그보다는 억제가 정확해 보입니다.
안으로 시각능력이 완전하고, 밖에서 형상이 시각영역으로 들어오더라도,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것에 일치하는 의식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M28 코끼리 발자취에 비유한 큰 경 § 27)
즉 내 감각기관에 들어왔다고 그리고 내 마음에 쏙~ 든다고 함부로 주의를 주지 말라는 말씀이십니다.
주의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볼 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saṃvara인것 같습니다.
즉 다생겁의 가치판단이 작용하는 것(습기, 식)을 억제하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방법이 사념처이구요. (몸에서 몸을 느낌에서 느낌을 마음에서 마음을 법에서 법을 보는 것이죠)
saṃvara : [m.] restraint, 防護, 律儀, 摂護, 抑制 (수호 보다는 억제이다.)
그래서 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S35:168 안의 무상에 대한 욕구 경1 (Ajjhattāniccachanda-sutta)
비구들이여,
눈은 무상하다. 여기에 대한 그대들의 욕구를 버려야 한다.
귀는 무상하다. 여기에 대한 그대들의 욕구를 버려야 한다.
코는 무상하다. 여기에 대한 그대들의 욕구를 버려야 한다.
혀는 무상하다. 여기에 대한 그대들의 욕구를 버려야 한다.
몸은 무상하다. 여기에 대한 그대들의 욕구를 버려야 한다.
마노는 무상하다. 여기에 대한 그대들의 욕구를 버려야 한다.
이 경이 속해 있는 품인 제35상윳따 - 제17장 60가지 반복 품(S35:168-S35:227. Saṭṭhi-peyyala)에서는
이와 같이 육근 및 육경에 대해서 무상 고 무아임을 반복적으로 설해주시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보시지만 물들지 않는다는 것은
육내입처로 육외입처를 감각하시지만
숙생의 업에 물들지 않는다는 말씀이 아닐까요?
S35:232 꼿티따 경
3. 눈(내입처)이 형색(외입처)의 족쇄입니까? 아니면 형색이 눈의 족쇄입니까?
4. 눈이 형색의 족쇄도 아니고 형색이 눈의 족쇄도 아닙니다.
이 둘에 반연해서 일어나는 욕탐이 바로 족쇄입니다.
7 만약 눈이 형색의 족쇄이고 형색이 눈의 족쇄라면,
바르게 괴로움을 멸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8. 세존께서는 눈(cakkhu)이 있고 형색(rūpaṃ)을 보십니다. 그러나 세존께는 욕탐이 없습니다.
세존은 마음이 잘 해탈하신 분입니다.
Saṃvijjati kho, āvuso, bhagavato cakkhu. Passati bhagavā cakkhunā rūpaṃ. Chandarāgo bhagavato natthi. Suvimuttacitto bhagavā.
이 설명은 꼿티따 존자의 질문에 대한 사리뿟다의 대답입니다.
형식상으로는 육근과 육경을 사용하시고 있지만
그 내용상으로는 욕탐이 없음과 해탈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일반인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하기위해 육근과 육경을 사용하면서
눈이 있고 형색이 있지만 욕탐이 없는 것의 표현이 육입처가 아닐까요?
하지만 중생인 저희 입장에서는 숙생의 업이 있어서 그렇게 간단하게 무념 상태로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즉 감각된 대상에 대해서 주의를 주고 그 대상을 현생의 나를 중심으로 계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대상의 유불리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생을 훤히 보신 분의 입장에서는 그 유불리는 별 의미가 없는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현생 밖에 모르는 중생에게는 그렇게 생각해 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이지요.
중생(衆生)이란 깨닫지 못했다고도 번역할 수 있지만 '윤회를 계속하는'으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생의 무리(衆)를 가지고 있는 자란 뜻이겠죠.
이런 나를 중심으로 하는 생각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대상의 가치를 다시한번 평가해 보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여인을 고름덩어리, 핏덩어리, 방구끼고 똥싸는 존재로 바라다 보는 것 같이
부정관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물드는가를 보여주는 경은 다음과 같다.
S22:81 빠릴레야 경(Pārileyya-sutta)
7.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아야 계속하여 일어나는 번뇌들이 즉시에 소멸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배우지 못한 범부는 거룩한 이를 보지 못하고 거룩한 법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가르침에 인도되지 못하고 참된 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된 사람의 법을 알지 못하고 참된 사람의 가르침에 인도되지 못하여 물질을 자아라고 관찰한다.
이렇게 여기는 행위는 형성[行]일 뿐이다. 그러면 이런 형성은 무엇이 그 원인이며,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기며,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가?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무명과 함께 하는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에 닿으면 갈애가 일어나고 이런 형성은 바로 이 갈애에서 생긴다.
그런데 이 갈애도 무상하고 형성되었고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이 느낌도 무상하고 형성되었고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이 감각접촉도 무상하고 형성되었고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이 무명도 무상하고 형성되었고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면 계속하여 일어나는 번뇌들이 즉시 소멸한다.”
S35:146 업 경 (Kamma-sutta, Kammanirodh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는 사밧티의 제타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카 승원에 머무셨다.
2. 그때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다. 비구들은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새로운 업과 오래된 업 그리고 업의 소멸과 업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에 대해서 설하리라. 잘 듣고 가슴에 새기도록 하여라. 이제 설하도록 하겠다.
Navapurāṇāni, bhikkhave, kammāni desessāmi kammanirodhaṃ kammanirodhagāminiñca paṭipadaṃ.
nava : [adj.] 1. new; 2. nine
gamina ,(adj.) being on a “gati,”
gati : [f.] going; career; course; passing on to another existence; destiny; behaviour
3.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오래된 업인가?
비구들이여, 눈은 오래된 업이라는 조건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고 의도의 토대가 되는 것이고 느낌의 토대가 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눈이란 오래된 업으로 행위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며 의도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며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중생에게 눈은 오래된 업이고 가치 판단의 결과이며 의도의 결과이며 느껴진 것입니다. 즉 숙생의 습이 식으로 작동하는 곳이 감각기관입니다. 이 습을 가동시켜 대상을 보기 때문에 혹은 분별하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으며 갈애가 발생하고 고가 일어납니다.)
비구들이여, 귀는 오래된 업이라는 조건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고 의도의 토대가 되는 것이고 느낌의 토대가 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코는 오래된 업이라는 조건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고 의도의 토대가 되는 것이고 느낌의 토대가 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혀는 오래된 업이라는 조건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고 의도의 토대가 되는 것이고 느낌의 토대가 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몸은 오래된 업이라는 조건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고 의도의 토대가 되는 것이고 느낌의 토대가 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마노는 오래된 업이라는 조건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고 의도의 토대가 되는 것이고 느낌의 토대가 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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