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무아- 그 위대한 발견

우암(雨庵) 2015. 3. 17. 11:55

항상 머리를 떠나지 않던 부처님의 수행 점차의 문제가

조금은 더 보이는 것 같아서 제 의견을 적어 봅니다.

 

제가 부처님 수행에 대해 항상 갖고있던 의문은

제자들에게 설법해 주신 수행의 점차와

부처님 당신의 수행 점차가 일치하지 않는 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의 수행 점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에 세존께서 출가하시고

알라라 깔라마에게서 무소유처정을 배우지만

그래서 그 무소유처정을 완벽하게 이루시지만

그 성취하신 경지가 원하시는 것이 아니어서 떠나셨다고 한다.

 

"그 때 나에게 ‘아무 것도 없는 세계’에 머무는 한, 그의 가르침은 ‘싫어하여 떠남, 사라짐, 소멸, 적정, 지혜,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끌지 못한다.’는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왕자여, 그래서 나는 그 가르침에 만족하지 않고 그 가르침을 싫어하여 그 곳을 떠났습니다."

 

'nāyaṃ dhammo nibbidāya na virāgāya na nirodhāya na upasamāya na abhiññāya na sambodhāya na nibbānāya saṃvattati, yāvadeva ākiñ­cañ­ñā­yata­nū­papat­tiyā’ ti. So kho ahaṃ, rājakumāra, taṃ dhammaṃ analaṅkaritvā tasmā dhammā nibbijja apakkamiṃ.

 

 

다음에는 웃다까 라마붓따에게서

비상비비상처정을 배우시지만

역시 경지가 원하는 것이 아니어서 떠나시게 된다.

 

 "나에게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에 머무는 한, 그의 가르침은 ‘싫어하여 떠남, 사라짐, 소멸, 적정, 지혜,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끌지 못한다.’는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왕자여, 그래서 나는 그 가르침을 존중하지 않고 그 가르침을 싫어하여 그 곳을 떠났습니다."

 

결론적으로 세존께서는 그 당시 배우셨던 당대의 최고 수준의 선정을 통해서도 괴로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수행방법을 바꾸십니다. 즉 고행을 수행방법으로 선택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세존의 수행방법은

(어릴 때의 초선)-무소유처정-비상비비상처정-고행-초선-2선-3선-4선-삼명의 순입니다.

 

그런데 경전에 기술되어 있는 바와 같이 선정의 점차를 9차제정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초선-2선-3선-4선-공무변처정-식무변처정-무소유처정-비상비비상처정-상수멸정

으로 기술 된다는 것입니다.

 

위 이야기의 서술에서 이상한 점은

이미 무소유처정 및 비상비비상처정을 경험하신 세존께서

깨달음을 얻을실 때는

초선에서 4선까지를 마치 새로운 것을 경험하듯이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물론 초선은 이미 어릴 적에 경험하신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2선에서 4선은 이전에는 경험하지 않으셨었던 것입니다.

 

세존께서 이런 수행의 과정을 경험하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실 때는 구차제정의 순서로 알려주십니다.

만약 위 순서가 후대의 창작이 아니라면 왜 이런 순서의 뒤바뀜이 생겼을까요?

구차제정이란 정말 세존의 가르침일까요?

아니면 기존의 선정 전통이 니까야에 슬쩍 삽입된 것일까요?

이런 의문이 들었었습니다.

 

즉 이런 세존의 깨달음 과정과 가르침 사이에서 나타나는 차이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무소유처정, 비상비비상처정은 색계사전정 없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구차제정을 말씀하셨는가?

왜 세존께서는 후에 수행의 점차를 가르치실 때, 당신의 경험과 다르게 정리하셨는가?

라는 질문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제게 든 생각은 구차제정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맞고,

깨달음 전후의 부처님께 나타난 차이는

모든 것이 조건지워져 있다는 '무아'를 아셨는가 모르셨는가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세존께서 수행을 하시기 시작할 초기에는

아마도 세존께서도 기존의 전통적인 견해에 따라서 나라는 변치 않는 존재(atta)가 있다는

'당연한' 생각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선정체험이란

세상사 복잡한 일에 얽혀서

드러나지 않고 숨겨진 나를 만나는 작업이었을 것입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면 관찰자인 내가

그 숨겨진 '나'라는 존재와 직접 대면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선정 수행을 깊이 하셔서 당대의 최고 선정 수준인 무소유처정, 비상비비상처정을 경험하시지만

입정을 통해서는 고요함을 통해 감각적인 욕망과 성냄을 벗어나실 수 있지만

출정을 하시고 나면 다시 탐과 진이 나타나서

그 당시에 알려진 선정만으로는 궁극적인 지혜에 도달하시지 못한다는 판단을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경전의 기술 내용에 드러나 있습니다.

처음 선정을 얻으신 것에 대한 기술에서 주목할 문장이 아래 문장입니다.

'그의 가르침은 ‘싫어하여 떠남, 사라짐, 소멸, 적정, 지혜,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끌지 못한다.’

 주목을 하여야 하는 단어는 제일 첫번째 나타나는 염리(厭離, nibbida)입니다. 싫어하여 떠남이라고 번역된 부분입니다.

이는 세존께서 당시에 높은 선정을 이루셨지만 감각적인 즐거움이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이욕(離欲, virāgā, 사라짐)이 되지 않으신 겁니다. 즉 감각적인 즐거움에 대한 욕망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괴로움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던 것이죠.

염리와 이욕 뒤에 서술되어 있는 nirodhā(滅盡, 소멸), upasamā(寂静, 적정), abhiññā(証智, 지혜), sambodhā(正覚, 올바른 깨달음), nibbānā(涅槃, 열반) 이야기는 나중에 깨달음을 완성하시고 나서 이해하신 내용이지 그 당시에 아셨던 내용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왜 높은 단계의 선정을 이루셨지만 염오와 이욕이 되지 않으셨을까?'가 됩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도 상윳다(Magga Sayutta)에 있는 것 같습니다.

S45:9 꺼끄러기 경 (Sūka-sutta)에 보면 잘못된 선정에 이르는 길은 잘못된 견해때문이라고 나타납니다.

 

비구들이여, 견해가 잘못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Ta kissa hetu? Micchāpaihitattā, bhikkhave, diṭṭhiyā.

 

즉 견해가 잘못되면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가 될 수 없다고 알려주십니다.

잘못된 견해는 잘못된 정진, 잘못된 마음챙김, 잘못된 삼매로 이끕니다.

따라서 정견이 없던 고타마 보살께서는 바른 삼매에 드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잘못된 삼매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염오와 이욕으로 이끌지 못하는 삼매입니다.

즉 삼매에 드셨지만 감각적인 욕망과 성냄이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견해를 갖고 계셨기에 당시의 수행자들은 깨달음으로 가지 못했을까요?

왜 높은 단계의 선정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염오와 이욕이 되질 않으셨을까요?

저는 그것이 바로 atta의 문제라고 봅니다. 나의 것, 나, 나의 자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감각된 것, 느껴진 것에 대한 주인이 존재한다면 그 주인은 당연히 그것을 소유하려 할 것입니다.

바로 이 문제가 염오와 이욕을 방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당대의 최고의 선정으로도 감각적인 욕망과 성냄이 해결이 되지 않으니

다른 방법을 선택하게 되시는데, 그 수행법이 고행이었습니다.

그 괴로움(욕망과 성냄)을 일으키는 '자아'를 고행을 통해서 길들이려는 시도를 하시게 되는 것 같습니다.

 

고행을 시작하기 전에 세존께 새로운 통찰이 나타나는데 그 내용은

깨달음의 필수 조건은 감각적인 욕망이 소멸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떠한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신체적으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서 멀리 떠났고, 그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대하여 감각적인 탐욕, 감각적인 사랑, 감각적인 혼미, 감각적인 갈망, 감각적인 고뇌가 안으로 잘 버려졌고, 잘 소멸되었다면, 그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공격적이고 격렬하고 고통스런 느낌을 경험하게 되더라도 그들은 앎과 봄,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공격적이고 격렬하고 고통스런 느낌을 경험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앎과 봄,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Evameva kho, rājakumāra, ye hi keci samaṇā vā brāhmaṇā vā kāyena ceva cittena ca kāmehi vūpakaṭṭhā viharanti, yo ca nesaṃ kāmesu kāmacchando kāmasneho kāmamucchā kāmapipāsā kāmapariḷāho so ca ajjhattaṃ suppahīno hoti ­suppaṭip­passad­dho. Opakkamikā cepi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dukkhā tibbā kharā kaṭukā vedanā vedayanti, bhabbāva te ñāṇāya dassanāya anuttarāya sambodhāya. No cepi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opakkamikā dukkhā tibbā kharā kaṭukā vedanā vedayanti, bhabbāva te ñāṇāya dassanāya anuttarāya sambodhāya.

 

즉 깨달음의 필수 조건은 감각적인 욕망이 소멸되어야 한다는 통찰이 생기신 것입니다.

 

 

 

제가 생각해 본 '고행을 수행의 방법으로' 받아들이시는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만약 자아가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셨다면 

그리고 내게 시도 때도 없이 감각적인 욕망을 추구하도록 마음이 일어난다면

그 의미는 그 자아라는 독립된 존재가 길들여 지지 않았다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현재 '나의 의지(관찰자, 이성)'는 그런 감각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싫다면

(왜냐하면 괴로움이란 바로 이 감각적인 즐거움의 추구과정 및 결과에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독립적인 자아가 감각적인 즐거움을 찾지 않도록 길들여 보는 것은 어떨까?

그 독립적인 자아를 내 의지의 말을 듣도록 훈련시켜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마치 말을 듣지 않는 짐승을 길들이 듯이..

 

세존께서는 그 '자아라는 것'을 고행으로 길들이기 위해서

단식과 숨참기라는 고행을 결행하시지만

그래서 극단의 고행으로 죽음의 문턱까지도 가 보셨지만

그 '자아'는 다스려지지 않는 것을 확인 하신 것 같습니다.

 

이 과정에서 세존께서는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고행을 하면서도 정진과 새김이 있었다고 말씀해 주시고

고통스런 느낌이 나를 사로잡지 않았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왕자여, 그러나 나에게 물러설 줄 모르는 정진이 있고 끊임없는 새김이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고통스러운 노력으로 지쳐 있었기 때문에 나의 몸은 격렬하고 불안정했습니다. 그렇지만, 나에게 일어난 그러한 고통스런 느낌이 나를 사로잡지는 못했습니다.

 

Āraddhaṃ kho pana me, rājakumāra, vīriyaṃ hoti asallīnaṃ, upaṭṭhitā sati asammuṭṭhā, sāraddho ca pana me kāyo hoti appa­ṭippas­sad­dho, teneva duk­khap­pa­dhā­nena padhā­nābhi­tun­nassa sato.

 

dukkhappadhāna: [dukkha+padhāna] 고행, 괴로움에 대한 노력

padhāna : [adj.] chief; foremost. (nt.) exertion; effort; striving

padhānābhitunna : [padhāna+abhitunna]
abhitunna : [pp. of abhitudati] Overwhelmed, overcome, overpowered , (찌름의 결과) 압도당하다.

tunna : [pp. of tudati] pricked; pecked; pierced; instigated, 찌르다, 선동되다.

 

세존께서는 죽음의 문턱에 까지 이르는 고행을 결행하시지만 깨달음을 얻는데는 실패하십니다.

 

나는 이러한 고행의 실천으로도 인간을 뛰어넘는 법, 고귀한 님들이 갖추어야 할 탁월한 앎과 봄을 성취하지 못했다. 깨달음에 이르는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제게는 이 실패가 매우 중요해 보입니다.

그 이유는 이 실패를 통해서 세존께서는 '변치 않는 자아(atta)'에 대한 기존 관념이 흔들리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정말로 변치 않는 자아가 있었다면 '당연히' 스스로를 보호하려 할 것인데, 세존께서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고행을 결행하셨는데, 그래서 그 존재의 존립이 위협을 받았는데도, 그런 존재는 나타나지도 않았고 따라서 길들여지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과연 변치 않는 자아란 존재하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드셨을 겁니다. 한편 고행을 통해서 세존께서 알려주신 것은 고통에 압도당하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세존께서 고행을 통해서 얻은 공덕은 아마도 바로 이 느낌에 압도당하시지 않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강한 정진과 마음챙김을 얻으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의미를 좀더 자세히 설명해 보면

만약 좋은 느낌 혹은 경험이 선정 중에 나타난다면

누구든지 '와~! 신나는 일이다!'하면서 반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느낌이 고행에서 나타나는 괴로움이라면

괴로움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마음을 다잡아 가려고 하실 겁니다.

그 마음을 다잡아 가는 것이 세존께서 알려주신 '정진이 있고 새김이 확립되어 있는 것'인 것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고행에서 괴로운 느낌에 압도당하시지 않습니다.

이미 이러한 느낌에 압도당하지 않는 경험을 충분히 갖추셨기 때문에

세존께서 깨달음으로 향하시는 색계사선정에 드실 때도,

즐거운 느낌에도 압도당하시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고행으로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신 후에

세존께서는 어릴 때의 초선 경험을 떠올리시게 되고

선정에서 오는 즐거움을 거부하시지 않자

(고행에서 괴로움을 대하시듯이 선정에서 희열과 행복감 및 느낌을 대하자)

선정 체험의 깊이가 깊어지고 결국 삼명을 얻으셔서

숙명통, 천안통을 통해서 세상이 조건지워진 것임을 직접 확인하시고

이러한 무명의 벗어남을 통해서 감각적 욕망과 성냄을 벗어나셨던 것 같습니다.

즉 누진통을 얻으신 것이죠.

 

나의 전생을 다 아시고 남의 운명을 안다고 하는 것은

즉 숙명통과 천안통이란

바로 연기법을 알게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조건지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라는 것 조차도 조건지워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무아를 알아내신 겁니다.

atta라는 변치 않는 존재는 없다는 것을 알아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깨우침 전에 경험한 무소유처정 및 비상비비상처정은

'자아(atta)'란 관념을 갖고 경험한 것이라서 그 수행에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경험하시게 되는 사선정에서는

안에서 생겨난 즐거운 느낌은 나를 사로잡지 못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그것이 나타나듯, 무명이 사라지자 명지가 생겨났고 어둠이 사라지자 빛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왕자여, 나의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그것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Ayaṃ kho me, rājakumāra, rattiyā pacchime yāme tatiyā vijjā adhigatā, avijjā vihatā, vijjā uppannā; tamo vihato, āloko uppanno—yathā taṃ appamattassa ātāpino pahitattassa viharato.

 

pahita : [pp. of pahiṇāti] sent ① a. [padahati<dhā 的 pp. cf. Sk. prahita] 熱心的, 努力的, 노력? 보내졌다? 두가지 뜻이 가능해 보입니다.

 

이 문장 번역에서 어려운 점은

전재성박사님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다!'로 번역해서 앞의 고행에서 괴로움에 대한 번역과 동일한 문장을 사용하소 있지만, 팔리어 원문에서는 그 표현이 다르게 나옵니다. 전박사의 번역은 "보내졌다!' 즉 붙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다로 해석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두 문장이 댓구를 이루는 것으로 보입니다.

appamattassa ātāpino 불방일하여 열심히 살았으며

pahitattassa viharato 보내버려서 머물렀다.

 

assa 陽性%单数%與格,屬格,

ino 陽性%单数,复数%與格,屬格,主格

pahīna : [pp. of pajahati] eliminated; abandoned; destroyed

Pahiṇa ,(adj.-n.) [fr. pa+hi] sending; being sent; a messenger

pahīyati : [pa + hā + ī + ya] vanishes; passes away; is abandoned

 

즉 이전에는 좋은 느낌이 세존을 사로잡었었지만

('이것이 나다!'라고)

깨우침에 이르는 수행에서는 그런 마음의 주의 기울임을 놓으셔서 (나에서 풀려남)

그래서 숙명통과 천안통을 통해서 조건지워진 세상을 보셨고

그래서 무아를 체득하신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제 경우에도 참선을 하다가 조그마한 체험을 하게 되는데

그 체험이 너무 강력하게 제 마음을 사로잡더군요.

즉 아무리 제가 무아라고 알고 있다고 이성적으로 이해해도

결국 이런 느낌이 오자 '나의 좋은 체험'이라면서 '내'가 강하게  튀어나온 겁니다.

그래서 오히려 제 공부에 퇴보가 있었구요.

 

즉 깨달음 전과 후의 차이란 바로 세상이, 내가 조건지워져 있다는 것

즉 무아를 철견하시고 못하고의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정견을 갖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였다는 겁니다.

 

 

M85. 왕자 보디의 경 (Bodhirājakumārasutta)

 

42. 이제 나는 단단한 음식이나 끓인 쌀죽을 먹어 힘을 얻어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어,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첫 번째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왕자여, 나의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43. 나는 사유와 숙고가 멈추어진 뒤, 내적인 평온과 마음의 통일을 이루고, 사유를 뛰어넘고 숙고를 뛰어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두 번째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왕자여, 나의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44. 나는 희열이 사라진 뒤,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평정하게 지내고 신체적으로 행복을 느끼며, 고귀한 님들이 평정하고 새김 있는 행복한 삶이라 부르는 세 번째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왕자여, 나의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45. 나는 즐거움과 괴로움이 버려지고 만족과 불만도 사라진 뒤, 괴로움을 뛰어넘고 즐거움을 뛰어넘어, 평정하고 새김 있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왕자여, 나의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46.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전생의 기억에 대한 앎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에 관하여 ‘한 번 태어나고 두 번 태어나고 세 번 태어나고 네 번 태어나고 다섯 번 태어나고 열 번 태어나고 스무 번 태어나고 서른 번 태어나고 마흔 번 태어나고 쉰 번 태어나고 백 번 태어나고 천 번 태어나고 십만 번 태어나고, 수많은 세계가 파괴되고 수많은 세계가 생성되고 수많은 세계가 파괴되고 생성되는 시간을 지나면서, 당시에 나는 이러한 이름과 이러한 성을 지니고 이러한 용모를 지니고 이러한 음식을 먹고 이러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맛보고 이러한 목숨을 지녔었고 나는 그 곳에서 죽은 뒤에 나는 다른 곳에 태어났는데, 거기서 나는 이러한 이름과 이러한 성을 지니고 이러한 용모를 지니고 이러한 음식을 먹고 이러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맛보고 이러한 목숨을 지녔었다. 그 곳에서 죽은 뒤에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기억했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나의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상세히 기억했습니다.

 

47. 왕자여, 이것이 내가 밤의 초야에 도달한 첫 번째 앎입니다. 참으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그것이 나타나듯, 무명이 사라지자 명지가 생겨났고 어둠이 사라지자 빛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왕자여, 나의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48.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뭇삶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앎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눈으로 뭇삶들을 관찰하여,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천하거나 귀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업보에 따라서 등장하는 뭇삶들에 관하여 ‘어떤 뭇삶들은 신체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고귀한 님들을 비난하고 잘못된 견해를 지니고 잘못된 견해에 따라 행동했다. 그래서 그들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다른 뭇삶들은 신체적으로 선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선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선행을 하고 고귀한 님들을 비난하지 않고 올바른 견해를 지니고 올바른 견해에 따라 행동했다. 그래서 그들은 육체가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난 것이다.’라고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눈으로 뭇삶들을 관찰하여,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천하거나 귀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업보에 따라서 등장하는 뭇삶들에 관하여 분명히 알았습니다.

 

49. 왕자여, 이것이 내가 밤의 중야에 도달한 후 두 번째의 앎입니다. 참으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그것이 나타나듯, 무명이 사라지자 명지가 생겨났고 어둠이 사라지자 빛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왕자여, 나의 안에서 즐거운 느낌이 생겨나더라도 그것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50.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번뇌의 소멸에 대한 앎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번뇌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번뇌의 발생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